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창래 Jan 24. 2020

꽁뜨: 썬크림은 직접 바르세요

동남아 여행을 하면 썬크림은 꼭 발라야 한다. 사오월이면 붉게 타는 정도가 아니라 피부가 벗겨질 수도 있고 심하면 짓무를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 기온도 높지만 자외선이 일곱 배 넘게 강하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된다. 자외선은 발암물질이다.      


그나저나 패키지 여행을 하면서 지나친 애정행위는 아무래도 불편하다. 드물게 혼자 온 사람도 있고, 애정표현이 익숙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둘만 있을 때는 별스럽게 하더라도. 어디를 가든 평균적인 말과 행동을 잠깐 탐색하고 그것에 맞추는 게 좋다.     

 

그 분들은 꼭 로비에 나와 버스를 기다리면서 썬크림을 발랐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는 발랐지만 남자는 여자가 정성스럽게 발라주었다. 애무하는 것처럼. 남자 덩지는 컸지만 말 잘 듣는 아기처럼 굴었고. 다 바른 다음에는 가볍게 뽀뽀했다.     


다들 감탄했다. ‘금슬이 좋으시네요.’, ‘보기 좋으셔요.’ 그러던 사람들이 조금 익숙해지자 농담도 조금씩 던졌다. ‘남편이 귀여우신가 봐요.’ ‘좋으시겠어요, 저런 부인을 두셔서.’ 여자는 조금 수줍은 듯 웃기만 했지만 남자는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 마눌하가 최고죠.’ 그 말을 할 때는 꼭 여자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적절한 제스추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여자는 살짝 피했고.     


이런 풍경을 두 시간마다 한 번씩 봐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아무래도 좀 불편할 것이다. 부러워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다들 익숙해지고 어느 날부터 두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 가이드에게 물었다.     

“그분들 어디 가셨어요?”

“남자분 얼굴 피부가...”

“그렇게나 정성스럽게 썬크림을 발라주시던데... 문제가 생겼나요?”     


“아직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남자분 얼굴에 바른 썬크림이 문제인 것 같아요. 썬크림 바른 자리는 모두 가뭄에 타 버린 논처럼 쩍쩍 갈라졌거든요.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다행히 여행자 의료보험을 들어두셔서 다행이지 뭐예요. 잘 준비된 것처럼요.”     


“아, 세상에! 여자 분 얼굴은 괜찮았나요?”

“그게 좀 이상해요. 같은 썬크림을 발랐다는데 여자분은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피부가 더 하얘졌어요. 더 고와지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제가 화장품회사 연구실에서 일하는 것 아시죠?”

“아, 그러시다고 하셨죠.”     

“혹시 그 썬크림, 유효기간이 많이 지난 것을 바른 것 아닐까요? 썬크림은 아주 잘 상하거든요. 오래된 건 쓰면 안돼요. 여자분 화장품은 아주 좋은 걸 쓰시던데. 당연히 그런 문제는 없었을 거고. 같은 걸 바르지 않았을 거예요.”     

그 여자 연구원은 잠깐 생각하더니 조금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죠. 유효기간이 지난 것은 틀림없을 거고요.”


“그렇잖아도 병원에서 확인했는데요... 유효기간이 많이 남은 것이었어요.”

“당연히 여자분은 자기가 바르던 것을 내놓았겠지요. 유효기간이 아직 남았다면 여자분이 그러지 않으셨겠죠. 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아무튼 곧 알게 되겠죠. 병원에서는 성분검사를 의뢰했는데 이삼 일 걸린다고 했거든요. 오늘이나 내일쯤은 정확한 걸 알게 될 겁니다.”     

 

“우리가 본 게 애정행각이 아니라 복수행각이었나 봐요. 남자분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더라고요. 키도 훤칠하고 미남이시잖아요. 부드럽고 따뜻한 성격이시고. 게다가 명품만 차고 다니시고.”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분이었어요?”     


“아마 제 기억이 맞을 거예요. 친구들과 모여서 나이트에 간 적이 있죠. 딱 한 번. 남자들이 룸에서 기다리는. 세상에, 제가 쓸 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요. 아무튼 짐작이에요. 썬크림만 바른 게 아닐지도 몰라요. 피부가 그렇게까지 엉망이 되었으면.”     


“그래서 다음부터는 썬크림은 자기가 직접 바르라고 말씀 드려야겠어요. 유효기간 지난 썬크림은 과감하게 버리도록 하고.”     

“사람들은 유효기간이 지난 것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청소용으로나 쓸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유효기간이 없는 게 어딨겠어요.

작가의 이전글 천재 대학교수가 쓴 야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