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로막는 바위를 만난다면

조용히 망치를 들어라.

by 바스락북스

나는 이미 정신이 몽롱해져 있었다.

3000미터가 넘는 히말라야 고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이미 7시간 가까이 작은 봉고차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터라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히말라야 돌산의 비탈을 깎아 만든 외길은 봉고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의 넓이였고, 반대편은 보기에도 아찔한 낭떠러지였다.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호수처럼 파란 하늘과, 지구 밖 어느 행성에 온 것처럼 황량한 회색빛 돌과 모래뿐이었다.


"오래된 미래"란 책으로 관광지가 되어버린, 고대 라다크 왕국의 수도 '레'로 가는 길은 길고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인도의 마날리라는 작은 도시에서 작은 봉고차를 타고 히말라야의 험난한 산자락을 오르락내리락하며 20시간 이상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레!

해발 3,500미터에 트랜스 히말라야에 위치한 레로 가기 위해서는 해발 5,320m,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길인 타그랑라를 지나가야 한다.

그나마도 이 길은 여름철 약 두 달 정도만 열린다.


마날리에서 레로 가는 버스 티켓을 끊기 위해 여러 여행사들을 둘러보던 중, 유난히 자신감 넘친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던 드라이버에게 속아 넘어간 건, 내가 인도 사람들에게 제대로 당해보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20시간이 넘어야 도착하는 길을 17시간이면 갈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새벽 일찍 출발하면 당일 밤늦게 도착할 수 있다고, 중간에 하루 밤을 허름한 현지 숙소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니 돈도, 시간도 아끼는 거라며 나를 꼬셨다.

여행 초반, 아직 순진했던 나는 그에게서 티켓을 샀다.


새벽 4시에 출발한 까만 봉고차는 6명의 여행객을 싣고 레로 향했고, 가로등도 없는 비포장 도로 위로 하얀 먼지를 푸석 푸석 날리며 7시간 달렸다.

그러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황량한 길가에 멈춰 섰다.


차 앞 20미터 정도 앞에 차 높이보다 훨씬 큰 바위 덩어리가 길을 막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게 대체 뭐야! 레로 가는 길은 이 길 하나뿐인데.'


드라이버와 가이드는 손님들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도 하지 않고서 차에서 내렸고

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 트렁크에서 작은 손 망치를 꺼내더니 바위로 향했다.


그리고는 바위를 깨기 시작했다.


'저 바위를 깬다고? 저 원시시대 돌도끼같이 생긴 손도끼로? 지금 21세기라고!! '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게 평온하게 바위를 깨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는데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나도 깨닫게 되었다.

여기 이곳에서 이렇게 돌을 깨는 것 말고는 별 뾰죽한 수도, 달리 할 일도 없음을.

고산 지대 때문인지, 너무나 비현실적인 상황 때문인지 나는 다시 정신이 몽롱해졌고,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회색빛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상황이야 어떻든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히말라야 고산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양 방향에서 길을 향해 오다 멈춰 선 버스, 봉고차들의 수는 하나 둘 늘어났다.

차에서 내린 현지인들은 하나같이 망치를 들고 바위로 모여들었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커다란 바위는 작은 돌멩이로 잘게 부수어진 채 길 옆에 나란히 쌓였다.


4시간이 지나 길은 뚫렸고,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3시간 후 우리는 또 다른 바위를 만났다.

드라이버는 아무말 없이 다시 망치를 꺼내 들어 바위를 깨고, 길을 만들었고 우리는 다시 달렸다.


출발 후 17시간. 우리는 목적지인 레에 도착하기는커녕 여정의 반도 못 갔고,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허름한 현지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SPECIAL BEDROOM HERE!"

"WELCOME"

"스페셜 베드룸 히어!! "_레로 가는 길.

10년도 더 지난 이 황당했던 여행길이 지금도 한 번씩 불쑥불쑥 떠오르곤 한다.

묵묵히 바위를 깨던 사람들의 뒷모습, 바위를 부수어 다시 길을 내고, 부서진 작은 돌들을 길 옆에 차곡차곡 쌓던 그 굵고 거친 손들, 말도 안 되게 파랗던 하늘이 말이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큰 어려움과 장애를 만났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다.

포기하고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일을 하며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불평, 불만, 후회, 비난은 소용이 없다.

어느 쪽이든 선택은 빠를수록 좋고, 앞으로 나가기로 선택했다면 묵묵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앞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망치를 들어 바위를 깨는 일이다.

깨고 깨다 보면 어느새 커다란 바위는 돌멩이가 되고 길이 뚫릴 것이다.


늦더라도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나가다 보면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거란 걸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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