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숍은 앤틱 한 가구들로 가득해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고, 한 세트에 20만 원 정도 하던 로열 알버트 커피 잔만으로 커피를 내놓는 핸드 브루잉 전문 커피숍이었다.
하얗게 쉰 머리를 길게 하나로 묶고 뜨거운 로스팅 머신에 시커먼 숯을 집어넣으며 연신 커피 향기를 맡아대는 주인아저씨는 뭔가 도인의 분위기를 풍겼다. 세상 모든 일에는 무심하고 커피에만 온 정성을 다하여 마치 커피로 “도”의 경지에 이르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듯했다. 그는 로스팅 룸에만 머물며 카페에는 거의 나오는 법이 없었다.
매장 관리는 주인아줌마의 몫이었다. 돈 관리, 직원 관리, 메뉴를 만드는 것 까지. 세상일에 통달한 도인 옆에는 항상 악처가 있다고 했었던가. 주인아줌마의 얼굴은 뭔가 모르게 어두웠고 근심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매장의 수입은 거의 매일 일정했음에도 주인아주머니는 10,000원 한 장에 얼굴이 폈다 말았다 하길 매일 저녁 반복했다. 주인아줌마는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었고 나에게는 꼭 필요한 지시 사항만 간단히 이야기하곤 했다.
도대체 주인아줌마의 표정은 왜 저리 어두운 걸까? 한 달에 2000만 원도 넘게 버는 가게 주인이 무슨 근심 걱정이 있어서 저러는 건가? 남편한테는 왜 저렇게 퉁명스러운 거야? 사람의 욕심이란 게 끝이 없군..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고등학교 다니는 시니컬한 외동아들은 매장이 끝날 때쯤 가게를 찾아와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씩 먹고 가게 셔터 내리는 걸 도와준 후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갔다. 엄마보다 키가 훌쩍 큰 사춘기 아들을 어린애 보듯 바라보는 주인아주머니의 표정에 애틋함이 묻어 있다.
테이블이 10개 남짓하던 작은 가게라 직원이라고는 매니저 하나에 오전, 오후 알바 2명이 전부였다.
주인아주머니를 언니라 부르며 온갖 눈치를 다 맞춰주던 성격 좋은 매니저, 대학교 휴학 중인 키가 멀대 같고 피부가 하얀 남자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말수가 적었으며 시키는 일만 군소리 없이 하던 나까지 총 3명, 그리고 주인아줌마가 항상 그 작은 커피숍을 지켰다.
아르바이트 일은 참 편했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다. 고작 하루 6시간 파트타임 알바였으니 주인은 나에게 항상 허드렛일을 시켰다. 화장실 청소, 설거지, 콜드 브루 병에 담기, 테이블 닦기 같은 것들 말이다. 가게에 온 첫날 커피를 서빙하며 손을 떨어 커피가 살짝 쏟아진 이후 매니저는 나에게 커피 서빙을 시키지 않는다.
실수로 커피 잔이라도 깨 먹었다 가는 일주일치 아르바이트비를 물어줬어야 했으니 그날 이후 주스, 아이스 음료 서빙이나 다 먹은 커피 잔을 치우는 일들이 내 일이 되었다.
뭔가 계획하지 않아도 되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이 일이 천성인 것 같기도 했다. 평생 이런 일이나 하며 한 달에 150만 원만 벌어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때였다. 언젠가 동남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아주 조그만 내 카페를 만들어 이렇게 단순하게 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오후 2시.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훅 끼치는 커피 향이 좋았다. 3미터 정도 되는 비좁은 바 뒤에서 손님들을 바라보며 “둘은 어떤 관계일까? 뭔가 안 좋은 일 있었나? 왜 표정이 어둡지? 커피가 맛이 없나? 저 여자는 성형을 너무 했네, 엇, 연예인이다. 실물도 장난이 아니구먼… 혼자 상상하며 보내는 시간도 즐거웠다.
손님이 많으면 많아서, 손님이 없으면 그냥 음악을 들으며 멍 때릴 수 있음이 좋았다. 이렇게 단순하고 평온한 삶이라니…
월급 70여만 원을 받고 한 달 만에 커피숍에서 잘렸다.
그만 일해주면 좋겠다는 통보를 받고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주인아줌마도 딱히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어색한 마지막 웃음을 끝으로 가게를 나와 따뜻한 봄날의 홍대 밤거리를 마구 쏘다녔다.
남자 친구는 고작 시급 5000원짜리 알바에서 잘린 나를 신나게 비웃었다.
9년 후.. 아프리카 커피 향기는 나를 커피 산지인 케냐 나이로비에 데려다 놓았다.
나를 신나게 비웃었던 남자와 나는 나이로비에서 로스터리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직원이 30명, 매장 수는 3개가 되었다. 매출은 늘고 직원은 느는데 수익은 늘지를 않는다.
항상 버는 돈 보다 쓰는 돈이 많다. 내 책상 위에는 결제하지 못한 인보이스가 쌓여가고 나는 애써 그 파일을 눈이 닿지 않는 책상 끝으로 밀어놓는다.
매장에 나가면 나는 손님들을 보지 않고 직원들을 본다.
제 자리에서 제대로 일하고 있는 건지, 구석에 숨어 수다나 떠는 건 아닌지, 메뉴는 주문받은 대로 잘 만들고 있는지, 혹시라도 돈이나 설탕이나 버터 같은걸 훔쳐가지나 않는지… 일을 하겠다고 와서는 저렇게 멀뚱멀뚱 시간이나 때우다 가는 답답한 직원들을 보면 화가 난다. 하루빨리 잘라버려야겠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직원들은 슬금슬금 내 눈을 피하고, 나는 가자미 눈을 뜨고 여기저기를 바쁘게 살핀다.
시작부터 일을 함께 해온 오래된 직원이 걱정스레 이야기한다.
사업은 성장하고 있고 손님들도 꾸준히 늘어나는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은 거냐고… 갑자기 억울해진다. 월급쟁이인 네가 주인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 넌 꼬박꼬박 월급이나 받으면 그만이지.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지, 내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하냐고!! 말 한들 알겠어? 왠지 모를 원망에 화가 훅 하고 올라오려는데 예전 그 커피숍 주인아줌마의 근심 가득한 어두운 얼굴이 떠오른다.
아… 이순간 갑자기 그 아줌마가 떠오르다니!!!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한동안 멍해진다.
며칠 전 한국에서 9명의 커피 전문가들이 커피 산지 투어를 위해 케냐를 찾았다. 지인의 부탁으로 그 단체의 일정 관리를 맡게 되었는데 참석자 명단에 ** 커피 사장이 있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커피숍을 들어서는 그녀를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주인 아주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 한 달이 특별한 경험이었으나 아주머니 입장에서야 나는 셀 수 없이 거쳐간 아르바이트생들 중 하나일 뿐이었을테니.
“고생 많으셨어요. 아직도 홍대 카페는 그대로인가요?
“이제 매장 일에선 한발 물러나고 이렇게 산 지 여행하며 살고 있어요.”
“좋네요. 고생 많이 하셨으니 이제 그러실 때도 되었지요.”
“ 짧았지만 칼*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저 참 좋았어요.”
“ 아.. 그랬어요?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카페에 아카데미까지 이렇게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어요.? 돈도 많이 들어갔을 테고, 타지에서 애 키우면서 이렇게 만들어내는 거 쉽지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