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수면패턴 [바다 수필집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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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수면패턴
나는 수면패턴이 중요한 사람이다. 10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는 새나라 어린이의 수면패턴을 어린이 시절부터 성인까지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은 내 시간대와 타이밍이 잘 맞지 않는다. 이럴 때면 나는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낀다. 다른 이들에게 나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감기는 눈을 뜨고 밤을 더 길게 늘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피곤해? 집 가고 싶어? 이런 말들을 듣는 건 부지기수. 부정할 힘이 없어서 희미하게 웃고 있으면자동으로 나를 중심으로 모임은 파산된다.
이런 내가 연인이라면. 커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당연히 무조건은 아니지만) 모닝인사와 밤 늦게 전화통화. 귀가길 통화나 모닝콜 등등. 이런 걸 다 놓쳐버리는 것이다.
혹은 내가 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하면서 내 일상을 한 칸씩 미루면서 시간대를 맞추는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내가 내 자신의 연인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장점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프롤로그에서 말한 것처럼 나와의 연애는 연애 초의 불타는 느낌 따위는없다. 오히려 연인의 세상을 내 세상과 합치는 기분의 시간들이다. 마치 이사를 가기로 결정한 새집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오래된 연인의 수면패턴. 이건 뭔가 더 현실적이다. 내일 뭘 하는지, 어떤 일정이 있는지 서로에게 툭툭 이야기 할 것만 같다. 거기에서 한술 더 떠서 네가 지금뭘 해야 하는지, 뭘 까먹었는지도 알려주는 사이가 상상이 된다.
이왕 나와 연애하기로 한 것인데 제대로 해볼까 생각이 든다. 잘 내 일정을 스스로 챙겨보는 것이다. 오늘 까먹은 것들을 내 감정을 넣지 않고 정말 보호자의기분으로 상기시켜보자.
오래된 연인은 내 기분을 이미 잘 아는 사람이다. 나의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며 매순간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하나 우울과 실패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내일을 내게 알려주는 사람이겠지. 연인이라는 것은 그런 면으로 사랑을 나타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 자신은 스스로를 방치하는 연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뭐라고 꿍얼꿍얼 의기소침해져 있어도 한번도 보살펴주지 않았다. 실패에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손 내밀어 주지도 않았다. 이건 마치 마약 브로커와 같은 태도였다. 선택은 네가 했으니 책임도 네 몫이지라고 방관하는 사람이었다.
내 애인은 다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나 스스로를 다정하게 대하고 싶다. 그 다정함이란 것은 꽤나 어렵다. 겉모습이 다정한지, 속모습이 다정한지. 다정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된 연인의 다정함은 나무 가구와 같은 따뜻함이 상상이 된다. 나의 일상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보호해주고 단단하게 받쳐줄 것 같다. 하지만, 내 절망이나 슬픔은 절대 내게 상기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조금은 내가 차갑다며 말할 수는 있어도 내게 객관적으로 오늘을 돌보는 말을 해줬으면한다. 저녁은 먹고 들어가라던가. 지금 잘 시간이니까 빨지 자. 내일 9시에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라던가. 낙관적으로 나를 위로 통통 쳐올려서 내가 추락할때 외면하는 짓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건 내가 위로라며 하는 짓거리이니까. 연인은 나를 단단히 받쳐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아차. 내가 나의 연인이잖아? 이런. 벌써부터 내 연인은 잔소리가 많을 것 같다. 잔소리를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는 지금의 내 꼬라지이기도 하다.
일단 몸상태부터 시작해보자.
턱 아프다며, 빨리 찜질하고 자.
내일 시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잠깐이라도 보고 자.
벌써 시간이 늦었네. 10시 반 전에는 자는 거다.
나의 연인이라면 정말 엄격할 것 같다. 내가 워낙 메타몽처럼 유들유들하다. 이렇게 쓰고 제멋대로 한다고 읽어야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입을 꾹 다물고 살짝 화나거나 굳은 얼굴로 저렇게 말하는 게 그려진다. 그러면 나는 이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저 세 개는 하려고 할 것이다. 꽤나 간단한 일이고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또 저 말들도 다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해주는 말들이고.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려고 한다. 타인은 아직 다 보지도 못한 내 마음의 구조를 나는 익숙하게 알고 있으니 더 쉬운 일이겠지. 한번 구석구석 쓸어볼까 싶다. 이제 전자레인지에 찜질팩을 돌리러 가야겠다. 나의 연인과는 항상 붙어 다니게 되었구나. 얼굴은 웃지 않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