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사는 사람의 최후

연재실패시즌2_15화 / 보라

by 금붕어

남들이 보기에 나는 모든 일을 이렇게까지 미룰 수 있다고? 를 해내는 미루기 대마왕이지만 실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느라 쉽게 시작할 엄두를 못 내는 타입이다. 무얼 하나 정리할 때도 머릿속에 A부터 Z까지의 수순이 정해져야 시작할 수 있고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분류가 돼야 첫 걸음을 뗄 수 있는 소위 ‘소극적 완벽주의자’다.


문창과 전공 수업 합평 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소설을 너무 쉽게 쓴 것 같다’였지만 그 시절 나는 노트북으로는 글을 쓰지 못하는 병에 걸려 종이에 소설을 쓰고 그걸 몇 번이나 다른 종이에 옮겨적은 뒤 그 종이를 보고 노트북에 타이핑하고 그걸 다시 종이에 옮겨적어 확인해야만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좋은 글을 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구보다 어렵게 글을 쓴다고는 확신할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미영은 나보다도 더 괴로워했다. 여기에 소극적 완벽주의까지 더해져 과제 마감 전 날 신촌의 24시간 카페에서 마감을 단 몇 시간 남겨놓고도 종이에 소설을 옮겨적는 미련한 짓을 자주했다. 그렇게 낸 소설의 평가는 ‘쉽게 쓴 소설’이었지만......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다. 인생 계획이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아 시작도 못한 채로 고민만 하고 있고 술자리에서 언제나 그 고민들을 끝없이 늘어놓으며 이렇게 정리했다 저렇게 정리했다 하는 생활을 꾸준히 하고 있다. 말하자면 내 인생이 나한테는 너무 중요하고 진지해서 뭔가를 할 엄두가 안나는 것이다. 그날도 이런저런 문제와 고민을 맥주와 함께 들이키다 보니 시간이 세 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집에 오니 공교롭게도 부모님이 안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씻고 내 방에 누웠다. 그때 아빠에게 카톡이 왔다.

나에게 삶이 너무나 진지한 나머지, 삶에 대한 고민이 너무 많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엄청나게 지나있었던 것인데...... 삶을 진지하게 살아내면 살아낼수록 한심하고 철없는 놈팽이로 보이고 마는 이 지독한 오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끝.


*늦어서 죄송합니다......연재실패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한 나머지 쓰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만 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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