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실패시즌2_23화 / 보라
식물에 물을 줄 때 물을 재워서 주면 더 좋다고 한다. 물을 떠놓고 햇볕에 놔두면 물속 염소 성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 와인을 따를 때 에어레이터를 끼우면 맛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나는 사용해보지 않아 얼마나 맛이 좋아지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후기들을 보면 정말로 맛이 좋아진다고 한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맥주를 마실 때, 때에 따라 다른 잔에 마신다. 그 ‘때’라는 게 실은 대부분 기분 탓이지만. 그래도 큰 잔에 마시고 싶은 날이 있는가하면, 작은 잔에 마시고 싶은 날도 있다. 큰 잔은 500ml 캔 맥주를 두 번에 나눠 따를 수 있고 꿀꺽꿀꺽 마시기 좋은 잔이다. 폭음하고 싶은 날 주로 이 잔을 이용한다. 작은 잔은 고작 두 모금 정도 마실 수 있는 양이 담기는 잔인데 홀짝 홀짝 마시고 싶은 날 이 잔을 이용한다. 그러면 어떤 잔에 마시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기분이 들고, 아니 이미 다른 기분으로 시작해 잔을 고른 거지만 아무튼. 물을 재우는 일이나 와인 에어레이터처럼 어떤 물리적,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분명 맛이 달라진다.
뭐, 물을 재우는 일이나 와인 에어레이터를 사용하는 일에도 물리적, 화학적 반응만 작용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행위를 하는 기쁨이 거기에도 더해져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식물이 잘 자라는 건 재운 물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식물을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와인 맛이 더 좋게 느껴지는 건 에어레이터를 사용하는 기쁨도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게 아니라면 안 된다. 그래야 잔에 따라 맥주 맛이 달라진다는 내 주장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