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를 선명하게 남기고 싶어졌다
퇴사 선언 다음 날
퇴사 의사를 밝히고 퇴사 날을 정한 날 밤, “딸, 백수 축하해.”도 아니고 “어이구 - 백수 축하드립니다 -“였나 아빠가 다른 대표들을 만날 때의 너스레 어조로 전화가 왔다. 그 찰나 무슨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내 울고, 웃고, 체하고, 화나고, 행복했던 회사에서의 5년이 스쳐갔다. 극히 내향적인 아빠가 한 회사의 주인으로서 술도 마셔야 하고 너스레도 떨어야 하는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도 겹쳐 보였다. 아빠는 가족을 위해 이 나이 되도록 일을 못 놓는데 나는 고작 5년 했다고 쉬어야 한다고 하는 것도 면목없고, 그간 거절해 왔던 다양한 제안의 기회비용도 생각이 났다가, 어디다가 말도 못 하는 이 퇴사 선언 상황도 억울했다. 한바탕 속 시원하게 울고 말았다.
하루하루를 선명하게 남기고 싶어졌다. 1월 9일에 퇴사를 선언한 것. 1월 9일에 공교롭게도 요가가 30회 마지막 차였던 것. 1월 9일에 공교롭게도 글을 쓰고 나누는 습관을 시작한 것. 이 모든 장단이 오직 나를 위해 딱딱 질서 있게 펼쳐진 것처럼 지켜보았다. 마치 트루맨쇼처럼.
퇴사 선언 다음 날 점심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2년 반전 지금 회사를 먼저 퇴사한 동업자를 만났다. 퇴사 소식을 전하니, 마치 내 퇴사만 기다렸다는 듯 거한 축하를 받았다. 그는 퇴사와 동시에 창업을 해 직원 17명의 회사를 꾸리고 있었고 최근에 60억 투자를 받았다고 했다. 이 바쁜 와중에 나를 연락한 바로 다음 날 만나 준거라니.
그 다음날 점심에 만난 또 다른 창업자는 500억 넘게 투자를 받고 회사를 키우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2년 반 전, 그들이 너도 그 회사에서 나와서 혼자 해보라고 했을 때. 그럴 때가 됐다고 했을 때. 우리가 다 같이 무슨 칼국수 같은 걸 먹고 앉아있을 때, 내가 물어본 아주 멍청한 질문은 고작 1억 정도 시드 받으면 대표는 월급으로 얼마를 측정하냐였다. 50만 원이었나, 150만 원이었나? 그들이 무모하게까지 느껴졌다. 30대에 150만 원이라니. 30대에. 2년이 지난 지금은 내 돈을 태워서라도 내 일을 할 판에 150만 원이나 받으며 일하면 감사한 일이 됐다. 나보다 2.5살 많은 그들의 2.5년 전의 결의를 이제야 몸소 이해해 본다. 그들이 2년 반 전에 먼저 낸 용기로 나도 도전하는 거란 말을 전했다. 나도 그들에게 언제든 다음 날 시간을 내어줄 수 있고, 밥도 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며.
따로 질문 리스트를 준비해 가지도 않았는데 궁금한 질문들이 그냥 술술 나왔고, 술술 대답을 들었다.
ㅁ 지금 브랜드 장사 하기 적기다. 이제 플랫폼이 아니라 현금을 확보하면서 나아가는 브랜드의 몸값이 올라갔다.
ㅁ 파트타임으로 현금 확보하면서 네가 원하는 거 파트타임으로 하는 것 좋은 접근일 수 있다.
ㅁ 속도 있는 성장을 원하면 투자를 받고, 내 페이스대로 가려면 내 자본금으로 가 베스트. 뭐가 더 낫고 그런 거 없고 취사선택이다.
ㅁ 몸집은 투자받은 회사가 커 보여도, 투자 안 받은 회사 창업자의 라이프는 더 좋을 것.
ㅁ X 없이도 회사가 별반 다르지 않으면 X가 떠나던 내가 떠나야 한다.
저녁에는 학교 선배를 만나 새벽까지 진탕 술을 마셨다. 선배는 어찌 술을 하나도 강요를 안 하는데, 눈 깜빡하면 평소보다 더 마시는 나를 발견한다. 선배랑 울다, 웃다 했다.
ㅁ Be my best date. 내가 내게 최고의 데이트 상대가 되어줄 것.
ㅁ 우리가 가진 능력, 인적 네트워크를 모든 사람이 가졌다고 착각하지 말 것. 감사하고 적극 이용할 것.
ㅁ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건 말로 설득할 수 없는 것. 그 사람에게 편하고 재밌고 즐거운 감정과 시간을 만들어 줄 것. 사람의 마음은 감정이 담긴 시간으로 사는 것.
급 삼성동이라니 10분도 안 돼서 나와준, 고등학교 선배도 만났다. 무려 풀 재택인 회사에 다닐 때 스스로 감옥을 만들고 갇혀있었던 게, 멍청한게 분명하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니. 만나고 싶다니 바로 만나주고, 세상 비싼 밥도 사주는 그들의 호의가 말도 안 된다 싶지만. 의심 않고 감사히 받겠다고 최면해 본다. 마땅히 내가 받을만한 호의여서가 아니고, 나도 그들에게 충분히 베풀었을 호의니까. 다음에 내가 더 크게 갚으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