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연봉 서른에 백수를 선언하다 3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있었다

by 배작가

퇴사하는 날


삶의 주인을 찾아왔다. 되찾아왔다.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라 생각하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아깝지 않았다. 잠을 줄이거나 일을 너무 열심히 하면 손해 보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 지난 5년간 회사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풀재택 환경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얻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내가 나 스스로 시간을 기갈나게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임을 증명한데 있다. 2023년 1월 13일, 나는 내가 나의 온전한 삶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세 번째는 이 화장품 업계를 잔뼈 굵게 알게 됐다는 것이고, 화장품에 결코 내가 아는 원가 이상 쓰지 않을 것임도 중요하고 중요한 레슨이다.


퇴사 다음 날, 집에 다시 꽃이 돌아왔다. 언젠가 내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했던 것처럼. 꽃줄기를 다시 잘라내고 밤새 죽은 잎을 잘라내고. 예쁜 화병에 담아 요즘 자주 앉게 되는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내 삶도 이 꽃처럼 예쁘단 생각이 들었다. 결코 나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지고, 이 장면에는 우주의 수고가 들어감도 느낀다. 가족들의 걱정,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응원해 주는 친구들, 묻고 따지지도 않고 한걸음에 내 곁을 지켜준, 들어준, 나눠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ㅁ 내가 웬 크립토시장과 결이 잘 맞을 것 같다며, 이 시장에 조금씩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단 얘기를 아아주 진지하게 들었다. 12살짜리한테 트레져 이사 자리를 맡기거나, 익명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미팅 때 얼굴을 절대 안 보여주거나, 무려 02년생이 텔레그램과 트위터를 이용해 트레이딩만 파더니 강남 한복판 팬트하우스를 산다던가. 패러다임을 부수는 수준을 떠나 아예 새로 만들어버리는 형태가 이 크립토시장에서는 왕왕 있는 일이라서. 10년 전 내 모습을 구석구석 기억해 주는 사람 앞에 앉아, “아 나는 원래 패러다임이 없는 사람이었지. 내 길은 내가 직접 만드는 사람이었지..” 했다.

ㅁ 보여주는 삶이 아닌, 보여지는 삶이길 바란다는 선배의 축언.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금 더 너를 믿고 너 페이스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 요즘 꼭 필요한 말을 들었다.

ㅁ 나는 한 치 앞을 모르는 내일이, 다음 주 이 맘 때가 마음 한편 불안하기도 한데, 내 주변 사람들은 너는 하나도 걱정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게 신기하면서도. 언젠가 내가 그런 말을 타인에게 했을 때가 떠올라서.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한 낯 부끄럼 없는 진실임을 마음 다해 믿어본다.


이전에 15:15 미팅을 주선했을 때가 겹쳐 보였다. 나는 이걸 막연히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친구 몇 명에게 말했더니 그들이 이리저리 그냥 그 일을 실현시켜 주었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일을 이게 뭐냐며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있었다. 그들을 우주처럼 대하고 아끼고 사랑해 줘야겠다. 밥 한 톨에도 우주가 담겼으니까.


새벽 아침의 비 젖은 산 냄새를 맡았다. 이 좋은 거 난 왜 지금 하고 있을까? 될 수 있으면 오래오래 이렇게 살아야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아끼고, 귀여워하고, 안쓰러워하고, 사랑해야겠다. 랑아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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