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버팀력이 바닥을 쳤을 때,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퇴사 전 체크리스트”를 검색해 보고는 별 도움을 못 받았다. 서류로 따지면 1년 치 급여 명세서, 근로소득 원천징수 영수증 정도만 챙기면 된다. 이직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추가로 경력증명서 정도. 퇴사를 결심했다면 HR 가기 전에 은행부터 가라 했던가. 백수가 되면 하기 어려운 카드 한도 풀로 올려두기, 마통 미리 만들기 정도까지?가 있겠다.
나는 이런 게 궁금했다. 예컨대, 8월에 전세 대출을 연장해야 되는데 그때 백수면 연장이 가능한가? 나중에 집을 살 때도 백수면 대출이 나오긴 하나? 그건 그렇고. 내가 월급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인가? 전화 몇 통이면 확인할 수 있는 문제들이기도 했지만. 단지 전화하는 게 무섭다는 이유로 나는 상상으로 못 한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래. 8월까지만 버티자 했었고, 만약 8월까지 버텼다면 다시 집 살 때까지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나 혼자 사는 집에 방 3개가 왜 필요하며, 기껏 뷰를 1순위로 보고 고른 집에서 뷰를 등지고 앉아 매일 컴퓨터만 쳐다볼 거였으면 왜 집에 저당 잡혀 삶을 버텨가나.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이걸 뼛 속까지 알고서도 모른 척, 슈퍼 I 가면을 쓰고 전화를 못하는 척했다. 내 버팀력이 바닥을 쳤을 때,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Q. 아 혹시, 전세 대출 연장 시 소득 증명서가 필요한가요? 백수여도 연장이 가능한가 해서요.
지금까지 이자 문제없이 잘 내셨으면, 연장은 백수여도 가능합니다.
Q. 집 살 때 백수면 대출이 나오긴 하나요?
카드로 월 200만 원 이상 쓰시면 대략 연 5000만 원 버는 직장인이라고 보고 그에 상응한 대출이 가능합니다.
전화를 한 지 10분도 안돼서 퇴사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졌다. 황당했다.
Q. 내가 월급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인가요?
이건 내가 내게 물어야 했다. 전화할 곳이 없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내 생활비가 월 천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렇게 믿고 살면 그렇게 살게 된다. 그래서 회사에서 천을 안 줄 때면 사이드로 천을 메꾸며 살았다. 억대 연봉이 넘어가고 나서는 사이드의 비중이 바닥으로 줄었고, 그래서 회사 의존도가 높아지게 됐다. 회사를 떠나보내고 내 손으로 다시 월 천만 원씩 내게 주어야 하는 상황이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커리어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나 스스로 밥도 못 먹일까 두려워진 거다. 나는 이게 진정한 커리어적 퇴보라 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부양할 가족도, 자식도 없는 내가 진짜 월에 천만 원이 필요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과정은 다음 화에서. 피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