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와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봤다
월급 없이 살 수 있다는 것도 확인됐다. 그럼, 도대체 뭐가 확인돼야 나는 비로소 사직서를 낼 수 있는가?
확신. 남한테 묻는다고, 그들이 괜찮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자기 확신. 그게 확인되어야 했다. 내가 이 회사를 홧김에 나가는 건 아닌지. 회사 이후 내 모습이 확실하게 그려지는지.
왜 없었겠나. 사회생활 8년, 한 회사에서 5년을 버티며 때려치울 기회가. 100번은 있지 않았을까. 대표랑 한판 할 때, 위에서는 쪼으고 밑에서는 배 째는데 중간에서 전전긍긍해야 할 때, 함께 일하는 재미를 알려준 동업자가, 믿었던 팀원이 나갔을 때, 더 좋은 조건의 이직 기회가 떠 먹여졌을 때, 평생 7성급으로 놀고먹어도 되는 결혼 제안이 왔을 때, 이름도 모르는 먼 친척이 죽길 바랄 때, 출근길에 사고가 나서 내가 죽길 바랄 때, 친구가 죽어도 회사는 나가야 할 때.
그때 나갔으면 나는 또 다른 회사에서 또 몇 년을 버티고 또 이 고민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버티는 게 맞나? 그게 스타트업이던, 대기업이던, 미국이건, 홍콩이건, 한국이건 내가 어디에 있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이 회사를 홧김에 나가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1, 2주에 한번 꼴로 전문 상담 또는 코칭을 받았다. 전문가와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봤다. 억대 연봉, 풀재택 환경, 대표와의 신뢰 관계, 나를 도와주는 팀원들,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업무 범위, 환경, 문화. 이런 조건들만 보면 회사를 나가는 게 그냥 객관적으로 미친 거 아닌가. 전문가도 미쳤다고 그냥 버티라고 했다.
버티되, 버티면서 내가 퇴사 후 원하는 모습을 먼저 그려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확실해지면 그때 나가라고. 어느 날, 근황 얘기를 하다가 최근에 내가 만든 책을 몇 억 치 팔았단 얘기를 했다. 전문가는 몇 만 원이 아니라 몇 억이 맞냐며 그거 엄청 대단한 일인데 어쩜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게 하나도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팔릴만한 주제로 만들었고 팔았다.
영국인 코치: “네가 쓴 책의 주제가 네가 좋아하는 건강 분야였어도 담담했을까?”
나: “아니, 마음의 건강에 관한 책이었다면 단 한 권이 팔려도 행복했을 거야.”
영국인 코치: “그럼 그 책을 썼어야 하지 않을까?”
나: “그런 책은 안 팔려.”
이 말을 뱉은 즉시 나는 내가 회사에서 하고 있는 짓이 무슨 짓인 줄 정확히 알게 되었다.
다음 글 [퇴사를 도와준 낯선 사람의 말 한마디]에 이어서. 피쓰.
+) 사진은 예쁘게도 답답한 퇴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