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협상까지 다 했는데 나는 주저했다
우리 회사로 와. 이직을 제안하는 대표님들의 달콤한 이 한마디는 퇴사를 도와주기도, 동시에 퇴사를 지연 지키기도 한 말이다.
퇴사를 하면 받게 되는 수많은 질문 중 하나는 다음 행선지에 대한 질문이다. 으레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말고는 회사를 나올 생각도 말라고 한다.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퇴사 축하해! 다음 행선지 정해둔 거지? 어디로 가?”
나는 다음 행선지가 나라고 한다. 어리둥절 한 표정을 본다. 보통은 다음 행선지가 다른 회사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직할 회사를 정하고, 멋지게 사표를 내고, 입사일까지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고, 때 되면 다른 회사로 출근하는 아주 이성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림을 상상하곤 했다. 그래서 스카우트 제의도 적극 환영하고, 이직 기회가 있으면 직접 지원했다.
구직 시장이란 소개팅 시장과 비슷하다. 소개팅 제안이 들어온다고 다 나가는 것 아니듯, 구직 시장도 이 조건 저 조건 다 맞을 때 인터뷰에 응한다. 하지만 억대 연봉, 풀재택 조건을 맞춰줄 회사는 아주 희소했기에, 일단 조건이 맞다면 성실히 응했다. 감사하게도 지난 5년간 꽤 인상적인 러브콜들을 받았다. 현 회사 연봉을 훌쩍 뛰어넘는 제안도 있었고, 뉴스에 나오는 대표님과 신사업을 같이 해볼 수 있는 제안,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할 수 있는 제안까지.
소개팅 시장이나 구직 시장이나 결국 마주하게 되는 진실의 순간이 있다. 아무리 상호 호감을 가지고 10번을 만난다고 해도, 상대가 “만나볼래?” 카드를 꺼냈는데 대답을 주저하게 된다면 꽝이다. 구직 시장에서도 나는 진실의 순간을 마주했다. “우리 회사로 와.” 연봉 협상까지 다 했는데 나는 주저했다. 조건도 맞고, 그 회사에서도 나를 원하고 나도 원하는 줄 알았던 아주 희박한 경쟁률과 확률을 뚫고서 결국 죄송하단 말을 했다.
다른 회사로 이직을 결정했으면 진작 퇴사를 했을 텐데, 다음 행선지가 다른 회사가 아닌 내 안에 있음을 깨닫기까지 퇴사는 지연됐다. 나는 나 자신이 다음 행선지의 옵션이 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이를 깨닫기까지 꼬박 5년이 걸린 것이다.
제품의 시장성을 테스트할 때도 잠재고객에게 “이거 상품화되면 살 것 같아?”라고 백날 물어보는 것보다, 1만 원이라도 실제 지불하는지 여부를 보라고 했다. 내 다음 행선지가 어딘지, 내가 뭘 원하는지 궁금하다면? 속으로 백날 물어보지 말고, 친구한테 조언 구하지 말고, 그저 나를 진실의 순간 앞에 두면 된다. 그럼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나와 마주할 수 있다.
+) 사진은 여백 없는 10페이지짜리 기획안도 보내드렸던 곳에서 온 오퍼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