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왜 사랑을 얘기하지 않는가

by 배작가

“지금 이 순간 나는 알아. 왠지는 몰라. 그냥 알아. 언젠가 너로 인해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알아. 그래 난 너로 인해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보다 많이 행복할 거라는 걸 알아.” 가을방학의 “언젠가 너로 인해”라는 노래의 한 소절이다. 멜랑콜리하다. 우리는 죽을 줄 알면서 살아가듯, 헤어질 것을 알고도, 아플 걸 알고도 사랑한다. 어찌 보면 인간은 참으로 비극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만약 우리가 영원을 살 수 있다면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대낮만 있고 삶만 있는 세계에 어둠과 죽음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삶은 죽음의 존재 하에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별의 존재 하에 존재한다.

헌데 시작부터 맥 빠지는 소리부터 해야겠다. 사실, 삶과 죽음을 논하는 철학은 충분하다. 오히려 철학은 설명을 하고에 있기에 그 생명력을 잃은 듯하다. 역사에서 현대란 없다. 우리는 파란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현대라는 시간의 흔적만을 추후에 확인하여 역사로 쓸 뿐이다. 시간은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있음은 이미 과거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하기에 ‘현대’를 규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죽음 후에야 비로소 삶이 설명 가능하듯, 삶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지옥에서 보낸 한철의 시도로 끝나지 않을까. 따라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는 철학자는 심각하다. 고통스러운 상념에 젖어 켜켜이 쌓여만 가는 생각의 무게 때문에 한 손으로 턱을 괴는 로댕이다.

삶을 설명하고자 하는 철학보다는 차라리 웃음이 더 위대하다. 인도의 영적 스승 오쇼 라즈니쉬가 중국 도가 사상가 장자의 강의를 해석한 책 <삶의 길 흰구름의 길>에서는 삶을 논하는 세 명의 벗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사람이 말했다. ‘더불어 살면서도 그것을 모를 수 있을까. 더불어 일하면서도 아무 열매도 맺지 않을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것을 잊고 공간을, 세상을 끝없이 날아다닐 수 있을까.’ 세 벗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전보다 더 좋은 벗이 되었다. 이는 데모크리토스의 냉소적 웃음과도 닮았다.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비웃음, 그전에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비천함에 대한 웃음. 삶은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설명을 시도할 때 그 설명은 언제나 죽음을 가리킬 뿐이다. 삶에 대한 철학 후 그들은 웃는다. 삶에 대해 웃을 때 그들은 곧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웃음이 병적 증상이 아니라 지혜의 징후임을 알게 된 히포크라테스는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들이 웃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랑은 어떠한가. 한 사람의 생애 삶과 죽음은 한 번일지라도 사랑과 이별은 여러 번이고 일어난다. 한 사랑은 한 이별의 끝에서 설명될 수 있는 듯하다. 그런데 철학은 왜 사랑을 얘기하지 않는가. 나는 정말 궁금하다. 시인은 즐겨 사랑을 노래한다. 반면 철학자로부터 사랑에 대한 담론을 듣기란 어렵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통속화되었기에 다의적이고 감정적이며 주관적이라고 판단되는 사랑을 말하기를 꺼리는 철학자의 우려는 정당히 이해된다. 하지만, 사랑 없는 삶이 어디 있는가. 21세기 모든 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듯하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죽음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죽어가고, 사랑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사랑한다. 이는 얼마나 딱한가. 오늘날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학문이 있고 진리가 있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하는 실증적 연구이다.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얄팍한 전략과 기술을 논하기 전에 사랑에 대한 뿌리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랑을 덮어놓은 채 삶을 얘기하는 것은 누구라도 삶을 모르는 것이 아니던가.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사랑’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이별. 이를 하이데거는 '존재의 자기 상실감'으로, 만해는 '재회를 전제한 부재'로 해석한다. 여기서 서양의 멜랑콜리 커와 동양의 멜랑콜리 커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이별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유는 그들이 사랑했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게 사랑 대상은 자기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 혹 자기 자신이다. 그가 강조하는 ‘자기 존재(Selbst-Sein)’는 자기로부터 멀어지고 상실될 수 있으나 곧 자기로 재귀하는 존재로써 존재의 자기 상실을 통해 현상한다. 즉, 존재의 자기 상실은 곧 자기를 존재하게 한다. 이별은 사랑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반면 만해에게 사랑 대상은 나와 님의 ‘사이’를 둔 철두철미 타자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만해로부터 하이데거의 상실감을 찾을 수 없다. 애초에 그는 ‘님’을 소유한 적 조차 없고 그래서 상실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존재를 존재케 하듯, 만해의 사랑은 사랑을 사랑한다. 그들은 상실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다르다. 하이데거는 철학을 해체하고 허물며, 즉 이전 철학을 긍정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전통의 적극적인 전유를 통해 도래할 존재를 맞이하고자 한다. 시인 만해는 다르게 접근한다. 그는 해부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 다가간다. 타자적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해.

헌데 무조건적인 사랑이 가능하긴 한가.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인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우리가 애초에 사랑 대상을 선택하는 것조차 동일화될 수 있는 대상에 한정된 선택이라 말한다. 지독한 자기 사랑 안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사랑조차 자기중심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타자를 나에게 동일화시키며, 자기중심으로 타자를 포섭하고 내면화하는 자기 동일적 사유를 통해. 만해 또한 타자적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얘기하는 듯 보이나, 실상 그의 사랑조차 자기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는 “나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노라 말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타자의 무조건적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때문에 님에 대한 나의 사랑도 그에 호응하는 무조건적인 모습이 요구된다.

자기 존재에 대한 타자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떻게 생기는가. 만해의 해석은 지독히 자기중심적인 듯 느껴진다. 그에게 타자의 사랑은 타자에 대한 내 사랑의 앞선 단계인데, 타자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나. 플라톤에 따르면 '사랑의 대상은 실상 타자가 아닌 자기의 분신이기에, 사랑은 불완전한 자기를 충만하게 완성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이라 설명한다. 플라토닉 러브의 본질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고상한 정신적 사랑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불멸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탄생하는 것이다. 혹은 앞서 프로이트가 얘기했던 데로 타자가 나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은 아닐까. 만해가 말했던 무조건적인 내 존재에 대한 타자 사랑도, 결국 타자가 타자 자신을 내 안에서 보며 타자 자신을 사랑하는데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한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국땅에서 밤에 혼자 잠드는 게 그렇게 마음 아팠었다. 몇 년을 혼자서 불을 끄고 잠을 청하려 노력했을 그 하룻밤 하룻밤이 얼마나 고됬을까 하고. 하지만 현실은 그런가. 정말 하룻밤 하룻밤이 지옥이었을까. 오늘 하루가 고되 불도 못 끄고 곯아떨어지는 밤도 있었을 테고, 내일을 기대하며 설레 뒤척이는 밤도 있었을 테다. 그래도 내가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상대에게 나 자신의 지옥을 봐서가 아녔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그의 밤이 고통이 아니라 그의 밤 속에서 보이는 내 모습이 고통이었을 거다. 상대는 다른 사람들은 그의 밝은 낮만 사랑하지만 나는 그의 어두운 밤도 염려하는 까닭에, 사랑하는 까닭에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나 자신에게 집중했을 뿐인데. 그저 나 자신을 염려했을 뿐인데.

어쩌면 처음 하는 사랑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 흔히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맹목적인 타자 사랑이어서가 아닌가. 대게 사랑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첫사랑만큼은 조심할 것이 뭐가 있는가. 처음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깊은 사랑이 결국 얼마나 큰 고통과 좌절을 야기할 수 있는 줄 모르니 사랑에 용감하다. 상대에게 내 모습을 발견하여 사랑을 시작했던, ‘사이’를 두고 타자를 사랑하기 시작했건 처음 하는 사랑의 과정은 맹목적이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그것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도 모르기에 자신을 자신이 아는 사랑의 틀에 갇히게 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자신만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생겨버린 후는 어떤가. 우리는 지식 그리고 경험이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게 만든다는 생각 아래 ‘앎’에 대한 욕구를 가진 존재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지식에 경험에 갇혀버리기도 하는 존재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건 고체에 열을 가해 녹이면 액체가 된다는 인류의 대단한 과학적 지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이 없는 아이들에겐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오고 북극곰이 운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이는 사실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는 처음 해본 사랑 안에, 그 사랑의 이별 후 상처 안에 다음 사랑을 키운다. 그래서일까. 타버릴 듯 뜨거웠던 첫사랑 후에 조금은 미지근한 다음 사랑에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어쩌면 상대도 나도 무조건으로 사랑을 퍼붓기엔 사랑에 대한 상처의 경험이 가로막기도, 혹은 그저 사랑에 지쳤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그런 서로가 서로에게 안타깝지만 그래도 미지근한 대로 좋은 사랑도 있다. 자신을 더 이상 버리지 않고도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것 같은 자만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대를 위해 바뀌고 내가 소멸되어가는 사랑은 이제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그 날 이후. 사랑은 그렇게 또 자기 자신을 세우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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