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말한다. 인간은 예외없이 누구나 특정 기분 속에서만 실존할 수 밖에 없다고.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특정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기에. 피투된 현존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에 있는 주체가 아니다. 이는 매체에 불과하다. 기분에 소유되고 언어에게 사용되는 진리의 매체다. 기분은 존재를 들어내는 현존재의 중요한 존재양식이자 주관적이지도 그렇다고 객관적이지도 않은 그런것이다. 기분은 엄습하며 통제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분은 덮친다. 밖에서부터 오는 것도 안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닌 기분은 내 세계를 바꾼다. 기분이 바뀌면 세계도 바뀐다.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을 기억하는가. 그 순간을 기점으로 거짓말처럼 인생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사실 안 왔으면 좋았을텐데 했지만, “안 왔으면 좋았을” 빛이 세상에 오듯, 사람은 사랑은 내 삶에 온다. 성큼성큼. 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 아무도 그 몸부림 잠재울 수 없다. 빛이 있는 세상은 “저로 인해 드러난 상처”들로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있는 내 삶도 “이별할 때에 만남을 기약하듯 만날 때 이별을 염려해야함”에 아플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아무리 애가 타도 억지로는 도저히 되지 않던 인연이 어느 순간 내 옆에 다가와서는 같이 걷고 있는 순간.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내 기분도, 내 세계도 바뀐다. 나는 분명 내 인생의 주인이자 주체인 줄만 알았는데 사랑에, 그 기분에 잡혀있는 매체일 뿐이다.
매일 쓰는 다이어리에 ‘무드 그래프’가 있다. ‘perfect’ 부터 ‘depressed’ 까지 하루 하루 마음의 무게를 찍으며 이 무게의 요소들을 짤막하게 남긴다. 이 요소는 늦잠을 잤지만 일교시 수업에 늦지 않게 도착해 숨을 고르는 교실이 되기도 하고, 아직도 연대를 헤매는 내게 친절히 강의실을 찾아준 훈남이 되기도 하며, 그저 컨트롤 불가능한 PMS가 되기도 한다. 기분은 그 날 내가 존재했던 공간에 의해서, 함께했던 사람에 의해서, 그리고 때로는 오롯이 호르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내게 무드 그래프는 내가 진정 기분에 소유되는 매체라는 걸 인정하는 한편, 칸트의 이성으로 ‘기분 그 놈, 내가 한번 분석해 컨트롤 해보겠다’는 오기기도 하다. 매달의 끝, 이를 분석해 큰 변동없는 다음달 그래프를 위한 다짐을 하기도 한다. “보통 집에 있게 되는 일요일이 가장 우울하네. 목요일밤은 학교 스케줄이 타이트해서 그런지 밤이 되면 피곤해 잠 못자고. 화요일, 또는 금요일쯤이 기분이 좋은데, 집에 있는 시간을 대폭 줄이자, becuase i deserve to be in a good-mood!” 대충 이런 분석 같지도 않은 분석이다.
난 문득 무드 그래프에 ‘gloomy’ 혹은 ‘depressed’와 가까워지는 지점이 내가 “멜랑콜리하다”라고 느끼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돌아보니, 이 지점에서 나는 글을 많이 썼다. 괜히 멜랑콜리한 노래를 틀어주는 라디오를 들으며 조명의 조도를 낮추고 일기를 써내려갔다. 밤이 새도록. 그래서 일교시 수업에 지각이 많았다는 변명아닌 변명도 해본다. “시인은 미쳤을 때 더 훌륭한 시를 만든다” 했던가. 그때 쓴 글을 지금 다시 읽다보면 위로가 된다. 그때의 멜랑콜리함에 감사하기도 하다. 반면 기분이 ‘perfect’ 한 날에 혼자 집에 틀여박혀 글을 쓰겠는가, 밖으로 나다니지. 그래서 기분이, 멜랑콜리함이 엄습해오는 날이면 더 이상 그를 극복하려, 피하려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니체처럼 그 자체를 사랑하고 향유하며 글을 써야겠다. ‘멜랑콜리로 멜랑콜리 극복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