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살이 가장 외로운 죽음이라고들 한다. 마치 한밤중의 도둑처럼 남몰래 준비한 끝에 홀로 맞이하는 죽음이라고 말이다. 자살은 충격적인 사건이자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자살의 모국어는 수치심이다. 만약 부국어父國語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침묵일 것이다.
자살은 고립적이라는 특성이 있다. 남에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할 수 없으며, 홀로 목숨을 끊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가까운 사람도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들은 충격에 빠지고 왜 그러느냐고 물을 기회를 모두 박탈당한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일반적으로 자살 관념과 함께 시작된다. 혹은 자살 관념을 일으키는 다른 일이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자살 관념이란 자살을 탈출구로 생각하는 것부터 직접 죽겠다는 더욱 강렬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자살 관념에 이어 자살 계획 수립이 이루어진다. 그런 다음 자살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죽음을 향해 논리적으로 한 발씩 다가가는 셈이다. 이러한 사고방식, 즉 죽음으로 이어지는 붉은 실은 죽은 사람이 살아 있던 동안 어떤 식으로든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던 것처럼 보이게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은 자의 말은 망자와 함께 무덤에 묻혔으며, 친인척은 슬픔과 회한 속에 남겨진다. 자살로 죽은 자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책임이 있는 자를 지목할 수도 없다. 이누 자연히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유서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는 식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서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해명한다. 유서는 일종의 애정 표현이자 친인척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시도다.
인류가 발전함에 따라 자아 성찰 등 인지 능력 역시 발달했다. 또한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기대하는 바에 미루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하게 되었다. 이는 자각적 의식이라고 하는데, 영화, 문학, 연극은 물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거짓말의 토대를 형성했다. 우리는 의미를 감각하고, 이웃의 멋진 집을 보며 질투를 느끼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쓸쓸함을 맛본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필멸성을 이해할 수 있다.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은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며, 우리가 생존하는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끔찍한 고통과 인간의 필멸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맞물리면 자살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발달한 호모 사피엔스의 뇌란 스스로 삶과 죽음을 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음이 존재함을 이해한다. 개인에게 죽음이란 자아의 소멸을 뜻한다. 우리는 자살이라는 개념도 이해할 수 있다. 자살이란 어떻게 보면 뇌에서 언어, 기호, 추상화, 가정假定이라는 환상적인 기능을 발달시킴에 따라 인간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삶을 진실되게 만들어준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삶에 온전한 책임을 져야 한다. 미리 정해진 의미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당신에게 달린 것이다. 단 한 번뿐인 당신의 삶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