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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다림 Sep 18. 2023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

진짜 사과는 아프다.

9월 1일 개강을 하루 앞두고 외부에서 맡게 된 프로젝트 시작을 위해 대면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개강 전날인데 회의가 있어서 피곤하다며 남편에게 아이와 저녁 먹고 잘 지내고 있으라며 억지로 끌려나가는 척 괜히 툴툴대면서 집을 나섰다.

사실은 해방감이 있어 설레는 외출이었다. 초3 아들의 여름방학 내내 삼시세끼 챙기고 같이 공부하고 학원 보내느라 내 학교, 내 연구실에 가지 못했고 내 일도 집에서 틈틈이 처리해야 하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절친한 후배 교수님과 함께 하는 거라 회의 후 티타임에 들떠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후배가 예전에 알려준 대형 카페로 갔다. 커피와 빵을 시키고 한참을 수다를 떨었다. 대형 카페다 보니 외부가 예뻐 산책 겸 구경을 하고 집으로 가려던 참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 미안한데, 00에게 화를 내버렸어.

참으려고 했는데 폭발했어. 최대한 빨리 와줄 수 있을까? 정말 미안해."


남편의 속상한 목소리에 후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사이 아들이 문자도 보냈다.


[엄마 몇시에올수있어 올수있으면빨리와조]


그래서 바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럽게 우느라 말도 잘 못하는 목소리를 듣고, 괜찮다고 엄마 10분 안에 도착한다고 다독였다.


집에 도착했더니, 성씨가 똑같은 두 사나이들은 각자 방에서 감정을 식히는 것 같았다.

먼저, 남편에게 갔다. 안아주고 괜찮다고 한 뒤, 아들에게 갔다. 나를 보자 달려와 안기더니 다시 서럽게 펑펑 울기 시작했다. 꼭 안아서 토닥토닥 쓰담쓰담...

아이가 진정된 후 상황을 물어봤다.


"내가 몇십 곱하기 몇십 문제 풀다가 힘들어서 울면서 짜증 냈어.

갑자기 아빠가 방에 가더니 혼자 소리 질렀어. 그래서 무서웠어."


우리 남편은 욕설이나 큰 소리를 치지 않는다.

연애 4년, 결혼 11년 동안 들어본 적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다.

그런 아빠가 소리를 질렀으니 아들이 많이 놀랐고 무서웠을 거다.


아들은 왜인지 아빠랑 공부하는 걸 싫어한다. 아빠에게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 같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남편도 그 사실을 알지만, 알아서 더 화가 난 것 같다. 곱하기를 다정하게 알려주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아들의 마음을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있는데 남편이 아들방에 들어왔다. 갑자기 안경을 벗더니 아들을 와락 안고는


"미안해. 미안해. 아빠가 정말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미안해......"


아빠의 사과가 아들의 마음에 닿았는지 다시 펑펑 울기 시작하는 아들. 그리고 그런 아들을 더 꼭 껴안는 남편. 둘을 두고 잠시 자리를 피했다.

아들이 우는 모습을 볼 때는 차분했던 내 마음이 남편이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울렁이면서 울컥 울음이 났다.




이기주 작가의 책 <언어의 온도>에서

"진짜 사과는 아프다"라고 했다.

남편의 사과를 보는데 저 글귀가 떠올랐다. 진정으로 사과를 전하는 남편의 모습이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진짜' 사과 한 마디로 이 사건은 생각보다 금방 마무리되었다. 개학을 앞둔 아들이 먹고 싶다는 치킨버거 하나로 다시 꺄르르 꺄르르 웃는 세 명이 되었다.


잠들기 전, 아들에게 물었다.


"아빠가 사과해 줘서 기분이 괜찮아졌어?"

"사실 내가 잘못한 건데 아빠가 미안하다고 해줘서 고마웠어. 아빠가 방에 갔을 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안 나서 못했어."

"그랬구나. 그럼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아빠한테 사과할까?"

"응!"


거실에서 나누는 둘의 대화를 엿들으며,

어른이 아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사과할 줄 안다는 건 정말 '사랑'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생각해 보니 집에 와달라고 나한테 전화했을 때도 남편은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꽤 여러 번 했다.)

전정한 사과를 할 줄 아는 멋진 어른 내 남편의 모습을 보며 자랄 우리 아들도 멋진 어른이 될 수 있겠다는 흐뭇한 마음이 드는 따뜻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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