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앉아 있지 않기로 했다.
조직이 나를 버렸다.
방치되고 외면당한 지 4개월이 되었다.
버려진 나의 실상을 숫자로 확인했다.
월급이 20퍼센트 넘게 깎였다.
굶어 죽을 일은 아니지만, 당장에 몸이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출발했는데 그들은 나를 저버렸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엄청난 과오를 저지른 전임자들에게 충성했던, 하마터면 모든 걸 말아먹으려던 자의 앞잡이요 대변자일 뿐이었다.
나를 믿고 지지하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 않다’고, ‘같이 믿고 가야 할 드문 인재‘라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많은 얘기를 해 주었지만 다 허사였다.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급하게 꾸려진 새 출발인 만큼 불가피한 조치가 필요했었던 거라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새 출발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나는 그저 과거의 구악이요 구태일 뿐일지도 모른다.
혹여 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고 해도, 대세에 쓸려 밀려나야 할 집단의 일원일 뿐이었나 보다.
봄을 맞아 대청소를 하는데, 쓰레기를 다 모아 큰 봉투에 담아 놓으니 깊숙이 10원짜리 동전이 보인다.
그 동전하나 꺼내려 애써 담아 놓은 쓰레기봉투를 뒤집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10원짜리 동전이 됐다.
잠이 잘 오지 않고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야 하는데, 속없이 잠만 잘 잔다.
대신 일주일에 두세 번 뒤숭숭한 꿈이 엄습한다.
대부분 내 쓸모가 사라져 나락으로 떨어지는 꿈이지만, 어떤 날은 비단길이 내 앞길에 펼쳐진 걸 나만 몰랐었다고, 이제 새롭고 중요한 일이 금방 맡겨질 거라고 알려 주는 꿈을 꾸기도 한다.
희망적 꿈을 꾸다가 눈을 뜨는 날이면 몸이 더 무겁다.
누워 있으면 몸이 천근만근이고 일어서면 발끝에 그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그렇게 한 번씩 처지면 끝간 데를 모른다.
그런데도 몸을 일으키는 건 이대로 스러지면 결국 패배자는 나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무너지면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사람이 대부분이겠지.
그러나 좋아 웃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 웃을 기회를 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간의 내 삶이 너무 아깝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내 인생이 아직 길다.
이대로 넘어지고 자빠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항상 정해 놓은 대로 일정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정해 놓은 틀대로 일과를 진행해야 뇌가 느슨해지지 않고 몸과 마음을 긴장시켜야 하는 줄 알기 때문이다.
게으른 뇌는 내게 읽지도 쓰지도 움직이지도 말도록 끊임없이 유혹한다.
뭐든 한번 손을 놓으면 다시 시작하기 어렵다.
관성은 언제나 정지와 무위, 느슨함과 안일함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그렇지 않으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려고 애쓴다.
뇌가 다른 쉬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지 못하도록.
아니면, 뇌가 충분한 휴식을 가지기 위해서 일단 정해진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인지하게 되도록.
자기가 할 일을 빨리 다 마쳐야 쉴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될 거라는 걸 알게 해야 한다.
눈을 뜨면 맨 먼저 국내언론 주요 기사를 다운로드하여 모두 훑어본다.
10년도 넘게 해 온 일상이다.
아무리 내가 망가져도 버려서는 안 될 습관이다.
내 정신이 온전한 마지막 날까지 할 생각이다.
다음으로는 외국어 학습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서 게임처럼 외국어를 연습한다.
실력이 늘어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냥 한다.
그리고 나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요즘은 글을 많이 쓰려고 한다.
긴 글을 써서 브런치에 올리고, 짧은 생각들은 스레드에 올려서 사람들과 소통해 본다.
글을 쓰고 모두에게 내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기 시작한 것도 앞으로 갈 길을 만들어 보기 위한 것이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써 본 글들에 좋은 사람들이 열렬히 반응해 주었고, 그들의 과할 정도로 후한 칭찬에 힘입어 계속 쓰기 시작했다.
내 직장 경험을 살려 글을 써 보았고, 내 전공을 살려 분석하는 글을 써 보기도 했다.
비록,
나를 버린 조직에 대해 상처가 크지만 그냥 떠나지는 않겠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내 자리를 찾아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겪는 좌절과 환멸과 분노를 많은 이들은 이미 경험해 보았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글로써 다가가고 싶어 하는 많은 분들에게도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반드시 닥쳐오는 위기일 수 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내가 생각해 왔던 것보다 온실 속에서 편안하게만 지내온 것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별 탈 없이 무난한 재주를 가지고 무난하게 살아왔으면서 불평과 불만만 많았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다치고 아파 보아야 한 번 더 단단해지고 또 일어나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장에는 내가 이 힘든 시간을 어떻게 이겨낼지 나 자신도 답이 없지만, 이겨내기만 하면 역시 소중한 나의 경험과 지혜가 되어, 더 단단하고 큰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지금의 내 나이는
어차피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것을 요구한다.
앞으로 몇 년 남지 않은 조직 안에서의 내 시간이 어쩌면 끝을 미리 준비하라고 준 아픈 신호일 지도 모른다.
큰 욕심 없이 조직 내에서 나를 마무리하고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고 생각해 온 만큼, 본격적인 새 출발을 준비해 보기 위해서 꽤 아픈 주사를 맞은 걸로 생각해야겠다.
이렇게 나를 다 잡으며 글을 써 보지만, 솔직히…
잘할 자신이 없다.
자신은 없지만,
길게 목표를 잡지 말고 오늘 하루만 잘 넘기자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자.
지금 내 처지를 한탄만 하지 말고, 생산적인 무언가를 계속하려고 노력해야겠다.
결국 순간이 쌓여 시간이 되고 한나절이 되고 하루가 되는 것.
그 하루하루가 쌓여 인생이 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또 하루를 버텨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