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환영 오찬, 선 넘은 질문들
누구도 편하지 않은 환영 오찬 자리, 눈 뒤집어쓴 펭귄이 줄 맞춰 지나가는 듯한 썰렁함 속에서, 구원투수처럼 나선 부장님의 질문이 시작된다.
"자, 이제 점심들 합시다! ㅇㅇ님도 새로 오셨는데 같이 식사들 하러 갑시다."
다행스럽게도 팀 내 최고참 동료가 나선다. 또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환영 오찬을 같이 하자는 얘기가 벌써 나왔거나, 신입에게는 묻지도 않고 선임들끼리 알아서(!) 식사 약속을 정해 놓았을 수도 있겠다.
팀 내 관리자격인 최고참 동료(편의상 부장님이라 하자)의 선언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한다. 우리의 신입은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엉겁결에 따라나서 식사자리에 합류한다.
회사 근처 새롭게 단장한 건물 2층에 높은 천장과 모던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이태리 식당에 자리했다. 인테리어부터 테이블에 놓인 식기까지 세련됐다.
그러나 신입에게 편할 수만은 없는 자리. 어색하기 그지없다. 신경 써서 차려입은 옷도 영 불편하다. 여기저기 끼는 것 같다. 잔등 어디껜가 가렵다. 신입 환영 자리라고 부장님 맞은편에 앉아 있으니 눈 둘 곳이 없다. 차라리 음식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소식이 없다. 그렇다고 입맛이 있을 리도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같은 자리 다른 동료들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팀 내 분위기가 좋다면 모르겠지만 원래도 서로 어색한 사이였거나 경직된 팀 문화가 있었다면 그들끼리도 식사를 자주 했을 것 같지 않다. 물 잔에 물을 따르고 주문을 마치고 나면 갑자기 할 없어진다.
새로 온 동료를 환영하긴 해야 할 것 같아 모여 앉아 있지만 뭐라 말을 시작할지 모르겠다. 어색한 농담이 나오면 과하게 박장대소하면서 분위기를 올려 보려 하지만 웃음이 잦아들면 분위기는 더 썰렁해진다. 눈 뒤집어쓴 펭귄이 줄 맞춰 눈앞에 지나가는 것 같다.
탁자 위에 식기를 만지작거리거나 주문한 음식이 언제 나올지 공연히 식당 직원을 붙잡고 물어보기도 한다.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며 중요한 업무 문자를 확인하는 척하거나 AI 검색창에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하지만, 너무 화면만 보고 있는 건 무례해 보일까 봐 오래 하지도 못한다. 그때, 부장님이 과감히 나선다!
신입 나이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사회생활이 처음이라면 더 어릴 듯. 얼음을 깨뜨릴 마법 같은 한마디가 시작된다.
"ㅇㅇ님 결혼했어요?"
안 했을 것 같다. 안 했다 치자. 답이 나오고 전광석화처럼 이어지는 질문, 너무 뻔하다.
"그럼 남자 (여자) 친구는 있어요?"
(성소수자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같은 건 있지도 않다.)
[경우 1: 있다면 본격적으로 취조가 이어진다.]
로맨틱 코미디를 즐겨 보시는 모양이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만났어요?"
궁합도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다. 질문이 끝이 없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나이는 몇 살 차이예요?"
[경우 2: 없다고 답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왜 없어요? 원래 없었어요? ‘모태솔로’인 건가? 취업 준비하느라 만날 시간이 없었나 보다. 마지막으로 사귄 게 언제예요?"
이내 부장님은 중매쟁이로 돌변한다.
"몇 살이라고 했죠? 여기 XX도 마침 싱글인데 딱 어울리네요. 그렇지 않나? 둘이 나이가 어떻게 되지?"
(남자가 연하면) "요즘은 연하가 최고지."
(남자가 연상이면) "나이 차 그 정도가 딱이야. 제일 잘 맞아."
(동갑이면) "친구처럼 알콩달콩 사귀면 좋겠네."
눈치 못 채는 사이 부장님은 말도 짧아졌다. 아.. 불쌍한 ㅇㅇ님, 이제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점심 메뉴로 뭘 주문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이미 점심식사가 끝난 건가…
여기까지 써놓고 생각해 보니 요즘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풀어 나가는 경우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적어도 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을뿐더러 내 주변에서도 이런 식으로 얘기를 풀어가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MSG 잔뜩 뿌린 내 머릿속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친한 지인을 만나 이런 대화로 시작하는 글을 써 보겠다 하니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서 최근 비슷한 질문을 받고 황당해했다는 동료 얘기를 들었다’고 하는 거다. 게다가 신입도 아니었단다. 뭔가 여러 사람의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글을 쓰려고 내가 꾸며낸 상황이라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비현실 판타지가 현실이라 입증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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