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괜찮더라고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내가 가진 꿈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곧 잘해왔고, 이대로만 한다면 내 목표를 수월하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지역 내에서 공부를 열심히 시킨다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내가 1 지망으로 쓴 곳은 학교 내에 ‘영재반’, ‘심화반’을 운영했다. 이 점이 매우 끌려서 부모님이 학교가 멀다고 반대했어도 그냥 소신껏 가장 가고 싶은 학교로 적어냈다. 운이 좋게, 어쩌면 운이 좋지 않게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가게 됐다.
15등까지는 영재반에서 공부하며 따로 그들만의 자습실도 있다. 30등까지는 심화반에서 공부하며 따로 다른 교실에서 모여서 보충학습과 야간 자율 학습을 했다. 나는 이 영재반에 들어가서 3년 간 공부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첫 시작부터 어긋났다. 중학교 성적과 입학시험에서 나는 18등 정도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난 첫 시작부터 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로 고등학교에서 첫 시작을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해서 다시 내가 계획한 대로 영재반에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노력했다 생각했는데 1학년 때 성적은 2-3등급 대에 머물렀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현실과 이상의 크나큰 괴리였다. 이대로는 의대를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내가 더더욱 열심히 한다면 내가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이상을 낮추지 않았다.
문, 이과를 선택하는 2학년 이후 나는 더 좌절을 맛보게 된다. 나는 중학교 때도 다른 과목보다 수학을 못했었다. 하지만 수학을 싫어한 적은 없었다. 이런 이유도 있고, 아버지는 한평생 문과였어서 나에게는 문과를 반대하셨다. 아마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이유가 가장 컸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이과를 택했다.
그러나 이과를 택한 후 성적은 더 떨어졌다. 하지만 열심히 살지 않은 건 아니다. 학생부 종합으로 갈 생각도 하고 있었기에 학술 동아리나 교내 상장을 20여 개 정도 받았었다. 생활기록부는 정말 멋지게 채워놨었다. 문제는 성적이었다.
고3을 시작할 때에는 어렴풋이 다짐을 했고, 여름방학 때부터는 결단을 내렸다.
“재수해야겠다.”
참 바보 같게도, 단번에 나의 이상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수능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고3 수능을 치르기도 전에 재수를 다짐했다. 그렇지만 최선은 다했다. 보통의 고3처럼 수능을 준비했고, 수능에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단 시간 안에 수능 성적을 나의 이상만큼 끌어올릴 순 없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 상장도 많이 받고, 고3 때 반장도 하며 여러모로 열심히는 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열심히 산 것.’ 대학 입시에는 ‘열심히’로는 부족하다. ‘잘’ 해야 한다.
난 ‘잘’ 하기 위해 재수를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