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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Sep 18. 2020

스스로 반할 때까지 해보는 것을 노력이라 부른다

노력은 노동이 아니다


노력을 평가 절하하지 말 것


“선배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근데 원래 잘하세요?”

    

학과 세미나를 준비하던 중 집행부를 함께한 후배가 말했다. 교환학생 시험 중 면접 만점을 받았다는 얘기가 내 실력의 이미지였고 학과 활동에 선뜻 참여하지 못하는 후배들을 하나둘 참석하게 만드는 모습도 부럽다며 연신 칭찬을 했다. 그리곤 공부든 대외활동이든 열심히, 그리고 잘 해내는 나에게 방법을 물었다. 하지만 열심히 하는 방법을 묻는 것인지, 잘하는 방법을 묻는 것인지 헷갈렸다. 열심히 한다는 것과 잘한다는 것은 다르다. 열심히 해서 잘하게 된 거라면 질문엔 ‘원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당시 내 마음엔 뭐든 잘 해낼 거라는 타인의 선입견과 자만하지 말아야겠다는 경계가 있었다. 후배도 나를 잘하는 사람으로만 봤던 게 분명하다. 후배의 질문에 열심히 한다는 건 내면에서 인정했으나, 잘하는 건 인정하지 못했다. 이런 불협화음의 뿌리는 불과 1년 전에 들은 말 때문이었다.      


“사범대가 아니라 일반 학과로 진학했어? 너 공부 잘했잖아.”

“네가 교환학생 시험에 합격했다고? 의외다.”   

  

나는 공부를 잘했다가도 못했고, 못했다가도 잘했다. 잘했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높은 커트라인의 학과로 진학하지 못한 결과에 실망했고, 못했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1년에 3명만 뽑는 교환학생 선발대에 내 이름이 있어서 당황했다. 많은 축하를 받긴 했으나 근본 없는 욕을 들은 것도 사실이다. 노력마저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질투는 생존 본능에서 기인한 감정이라 이해는 되었지만 쿨하게 한 귀로 듣고 흘러버리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상처 받은 마음은 쿨병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부족(want)하니까 원한다(want)

잘했다가도 못했고, 못했다가도 잘했던 것은 내세울 만한 타고난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타고난 게 없는 사람이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노력’ 밖에 없었다. 질투를 벗어나는 방법은 더 노력하는 것뿐이었고, 못한다는 딱지가 덜 아프려면 스스로 실력을 기르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다. 그래서 외국어만큼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잘하는 것을 목표했다.


허나 시작부터 막막했다. 작심삼일, 빨리 늘지 않는 실력, 타고난 언어감각이 넘치는 사람들, 해외파, 교포 등 개인 능력 부족과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은 말 그대로 장벽이었다. 어제 본 것이 오늘 기억나지 않아 한숨을 내쉬는 일이 일상이었지만 그 일상이 쌓여 무의식적인 총량으로 바뀌었다. 영어 'want'는 명사로는 '부족'이라는 뜻이고, 동사로는 '원한다'는 뜻이다. 나는 부족하니까 원할 수 있었고, 여전히 그게 나의 동력이다. 잘하는지 못하는지 별 생각이 없었을 때쯤 나는 잘하는 사람으로 불렸다.


B실 내 자리. 주말이면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햇살과 인사


노력을 대접할 것


인간의 본성은 불편하고 위협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한다. 당장 근육이 찢어질 듯한 고통스러운 운동을 할 바에 한 시간 더 자고 싶은 건 게으름이 아니라 신체적 선호일 뿐이다. '넵.' 병에 걸려 과도한 업무를 필터링 없이 처리할 바에 친구들과 연어를 먹으며 ‘꺄!’ 소리를 내고 싶은 건 심리적 안정을 찾고 싶은 본능이다. 솔직한 마음으론 흥청망청 쉬고 싶고, 노력 없이 잘 되면 좋겠다.   


학과 생활을 지나 대외 활동, 졸업을 하고 나니 임용 시험, 수험 생활을 탈피하니 세상의 모든 각자가 전문가였다. 수험생을 기준으로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지만 원어민을 기준으로는 못하는 사람이다. 타인과의 비교는 외재적 자극이 될 수는 있으나 동기부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속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반할 때까지 내 노력을 신뢰하고 따르는 고통을 감내하는 자세다.      


생명체인 우리는 생로병사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태어남과 늙어감과 병듦과 죽음이라는 그 모든 계기에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고통은 늘 발생한다. (...) 고통은 ‘항상’ 상승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바로 그 본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상승을 원하는 의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만족한다면 더 이상의 추구는 없다. 그 불만족 상태의 의지가 느끼는 불쾌감, 그것이 바로 고통인 것이다. *

   

교환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한 사실이 누군가에겐 황당한 일이었겠지만 그는 행동하지 않았고 나는 행동했을 뿐이다.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평가를 받는다. 영화 <기생충>도 9.07이라는 평점을 받는다. 내가 아침마다 운동에 나서는 것에 ‘피곤하게. 운동 안 해도 잘 산다.’ 라던지 ‘친구들이랑 연어 안 먹어도 안 죽는다’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즐거움과 성취를 평가 절하하는 태도를 대접할 생각이 없다. 노력은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노력은 노동과 동일한 게 아니다

노력은 성공과 능력을 재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그래서 노력은 과정의 의미가 큰 것이다. 노력으로 일궈낸 실력은 유동성이 크다. 며칠 하지 않으면 이전에 잘한 것들이 증발되기 쉬워서이다. 또한 유동성이 크다는 것은 절대성이 없는 것이다. 노력은 노동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을 칭찬할 뿐 노동을 칭찬하진 않는다. 노력엔 좌절, 피드백, 발전, 성취의 기쁨이 있다. 그러니 노력하고 싶은 게 있다면 시작점이 어디든 일단 하면서 키우는 것이다. 키우며 기다리는 시간이 쌓이면 노력이 실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드러나는 실력엔 노력이 있고, 노력에는 상승을 위한 고통이 있다. 여전히, 아니 어쩌면 평생을 스스로 '완전히' 잘한다고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그 끝이 없어서 더 재밌을 거라 기대한다. 노력이라는 묘미가 그 재미를 더 해줄 것이다. 나에게 노력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반할 때까지 해보는 묘미이다.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다음과 같다. 위험하게 살지어다! 그대들의 도시를 베수비오 하산가에 세우라! 그대들의 배를 미지의 바다로 보내라! 그대와 동류의 인간들, 그리고 그대들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살라! **



*「인생 교과서 07 니체」 p.61

**「즐거운 학문」 p.526




# 묻는 말

독자님께 ‘노력’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노력을 얼마만큼 신뢰하나요.

지금 무엇을 노력하고 있나요.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잘한다고 칭찬하면 더 잘하는 사람입니다. 독자님은 어떤 것을 칭찬받을 때 가장 성취감을 느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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