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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의 예민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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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y 15. 2024

잘못한게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슬픔은 끝나지 않는다

예민한 나와 화해하기

예민한 모습을 유난스러운 불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불필요한 짐을 이고 사는 사람에게 그 짐을 내려놓고 살아도 괜찮다며 동정을 보내는것 처럼 위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려놓을 수 있는 짐이면 진즉 내려 놨을거다. 힘들게 살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왜 그렇게 예민해?
너무 까다롭네.
왜 그런 생각을 해? 대충하고 넘어가.
그걸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도데체 왜 그러고 있는거야?
너무 생각이 많아.
사소한 일을 너무 크게 대하지마.
참 유난스러워.
모든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말고 적당히 털어버려.

예민하다는 말엔 부정적인 어감이 통용된다. 예민함에 대한 외부적인 평가를 익숙히 들으며 사는 동안, 내 예민함에 대해 나조차 몰랐던 부정적인 자아상이 씨앗처럼 심겨졌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이면에서 자기불신이라는 뿌리가 틔어나 자라났다. 나는 분명히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사는 사람인데도 항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꼈다. 부족하지 않은 외부조건을 갖췄음에도 항상 더 많은 것을 찾아 다녔다. 충분히 잘 해내고 있는 관계에서도 불편을 느꼈고 상대방의 부족한 모습은 치명적인 불안으로 다가왔다. 일을 할 때도 무엇이든 잘 대처하고 문제도 척척 해결하며 손발이 빠르고 꼼꼼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내가 보는 나는 참 불안정하고 못나보였다. 쉬지 않는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지만 어딘가 씁쓸했다.

예민한 사람으로서 나는, 나의 예민함을 모른척했고 알고 싶지 않았고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예민성을 거부했다. 조금 더 성격이 무던한 사람처럼, 예리하게 파고들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둥근 돌이 바닥을 부드럽게 굴러가듯 살려고 했다. 작은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쿨하게 살아야 된다고 믿었다. 이 믿음은 자기 불신이라는 씨앗에 녹진한 거름이 되었고 나의 무의식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마음껏 펼쳐갔다. 그 씨앗이 자라나 줄기가 세워지고, 꽃이 되어 활개를 치는 모습으로 커져갈 수록 나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동안 내가 사랑했던 일, 취향, 관계, 사소한 취미까지 모든 일에 흥미와 관심이 사라졌다. 단순한 술자리와 친목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휴식과 놀이도 내 불안을 달래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했고 싫어했는지 생각하는 일 조차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자기자신이 되는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떠드는 사회속에서 나는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군지 들여다보는 워크숍과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관계, 일, 돈, 건강과 같은 영역이 아닌 나와 일에 관한 주제였다. 이런 외부 프로그램은 나를 알고, 내가 하는 일 정의하고, 사회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을 키워가는 방향으로 설계되는게 대다수였다. 진정한 나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매번 열심히 참가했다. 내가 잊고 지낸 과거를 되돌아보며 지금의 나를 바라보고, 미래의 나를 예견하며 건설적인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 샘솟는 불편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거지?'

과거에 나를 이루었던 사건을 재정립하여 지금의 나를 인식하고, 일 하는 자아를 설정하여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작업만으론 나를 알아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깊은 기저에 나다운 내 모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표면적인 내 모습을 글과 말로 적는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와 깨달음을 준다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주변 사람들이 보는 내 모습, 내가 인식하는 내 모습, 나의 자아를 이루는 특정한 사건으로부터 알게 된 배움을 정리하고 조합하는 일은 분명 일말의 의미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프로젝트에 열심히 참여하며 건설적인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할 수록 거부감은 심해졌다. 프로그램을 설계한 사람에게도, 프로그램에 참조된 책에게도, 스스로 써보는 내 이야기에도 나는 속시원한 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고통스러웠다. 꾸준히 쓰는 일기, 매일 읽는 책, 더 나은 나를 만나고 싶은 욕심과 열망에도 불구하고 고장난 나침반의 초침처럼 나는 그 자리를 빙빙 돌기만 했다.

'남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매사를 심각하게 사는걸까? 내가 나를 의심하지 않고, 무언가 잘 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온전하며 행복할 순 없을까?'

내 의심은 빙하의 보이지 않는 아래 부분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어쩌면 불안의 씨앗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은 바닥에 뿌리 박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 불안과 의심을 지울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그 후로도 내 방법은 달라지는게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책을 찾아보고, 단순한 재미로 심각한 자아를 잊어보려고 했을 뿐이다. 그럴수록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강박이 되었고 강박이 되자 실수에 대한 불안도 커졌다. 잘못한게 없는데도 무언가 실수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어떤 일이나 관계가 잘못되는 것 같으면 모두 내 책임으로 느끼게 되었다.

'어떻게' 에 집착하던 어느날 깨달았다.

이걸 해결할 방법은 없다는 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 더 편안해 지기

예민함에서 오는 '문제' 들이 악마처럼 나를 괴롭힐 때 그 악마를 잠시 잊거나 잠재울 방법은 많았다. 데이트하기, 음식먹기, 책 읽기, 예민하지 않은척 하기처럼 잠시나마 예민함에서 벗어나 예민하지 않은 척을 하는건 쉽다. 그러나 그 순간이 끝나면 예민한 기질을 언제든 다시 가슴으로 느껴졌고 나는 내 예민함을 어찌 다룰 줄 몰라 매번 지치기만 했다. 하지만 나의 예민함을 해결할 문제가 아닌 받아들여 볼 면모라고 생각하게 된 순간 문제가 사라졌다. 배가 고프면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사먹는게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것 마냥 내 예민함과 예민함에서 오는 온갖 고민을 해결하는 일도 속시원한 방법이 있다고 믿었던게 나를 괴롭게 한 것일 뿐이었다.예민함이 주는 불편한 모습을 해결할 비법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머리와 마음에선 한줄기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예민함을 부정적인 것이라 여긴 것. 나의 잘못된 신념이자 허상이었다. 다만 이리저리 날뛰는 원숭이 같은 이 기질을 조금 다룰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예민함을 다루지 못해서 고개를 드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급급한게 아닌, 좀 더 근본적으로 예민함을 다루고 싶은 욕망이 솟아 올랐다. 거칠게 방방 뛰는 예민한 기질을 오랜 기간 동안 매일 들여다봤다. 일도 그만두고 사람도 만나지 않고 어떠한 사회적 활동도 하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하루 종일 내면을 직시했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잊을 정도로 매일 똑같은 나를 바라보았다.

어떤 날은 더 날카로워지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말 한 마디도 크게 받아들여지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날은 낭창할 만큼 아무런 소란이 없기도 했다. 끝도 답도 없는 나의 모습을 바라 볼 땐, 처음엔 민망하고 오글거렸다. 그러다가 아주 조금씩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예민한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다루지 못해서 생긴 아픔을 그대로 바라보려고 애썼다. 꼬박 1년이 넘는 시간동안 나는 사회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태초에 태어난 모습 그대로의 내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 같았다.

예민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잘 했던 것을 생각했다. 어릴 적 그림, 글쓰기, 발표를 잘 했던 것도 창의적인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기 쉬운 예민함 덕분이었고 일을 꼼꼼하고 세심하게 처리해서 능력을 인정 받은 것도 예민한 사람의 강점이었다. 커뮤니티 속 수백명의 사람들에게 동일한 미션을 주고 그들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 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도 공감력이 좋은 예민한 기질 적분이었다. 다분히 온전하고 뛰어난 나의 예민을, 단 한 번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본적이 없구나. 안타까운 후회가 몰려왔다. 내가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서 여지껏 그 먼 길을 돌아 걸어온 것 같았다. 이제부터라도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이 한 문장을 천천히 곱씹었다. 내 예민함을 무시하며 제발로 걸려 넘어진 실수가 떠올랐다. 내가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 조차 인정하지 못했으니 매사가 불안하고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극을 받아들이는 세포가 남들 보다 많아서 반응이 드러나는 스펙트럼이 넒은 것일 뿐, 예민한 기질은 잘못과 상관 없다. 이를 받아들이자 나는 이제껏 느끼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작은 일에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행복이란 말부터 너무 느끼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나의 행복이었고 하루종일 나쁜일이 없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자극의 상당부분을 차단하고 오히려 단절이 편한 상태가 내 행복의 전부였다. 예민한 나를 나부터 가슴 깊이 인정하고, 진리마냥 받아들이자 숨부터 편안해졌다. 먹는 음식이 감사하고, 하는 일이 감사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하고, 오늘 하루를 잘 보낸 나에게 감사했다. 이전과 다르게 감사해서 행복한 일상이 생겨났다. 밑도 끝도 없는 불안에 시달려 없는 미래를 걱정하고 남을 의식하던 나와 이별했다.

또한 예민한 기질을 근거없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멀리했다. 모든 원인과 결과를 나의 예민함으로 탓하는 분위기를 손절하고 그들에게 나의 인생을 맡기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싫어하고 비판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예민한 사람은 더욱이 남과 자신을 다르게 만드는 이 기질에 대해 눈치를 보면 안된다. 예민하지 않은 다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시 또 밑도 끝도 없는 정신적 불안과 불신에 쌓인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게 싫지 않은가? 예민함을 당당하고 편안히 드러내고, 그 기질에 대한 허락을 남에게 구하지 마라. 나의 기질은 오직 나만이 허용할 수 있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라는 문장은 갈피 없던 내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유롭게 했다. 나의 기질을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랑이 시작되어야 우리는 이 세계의 이방인이 된 것 같은, 외로움과 슬픔이 끝날 것이다. 평생 예민한 나에게 화만 내며 살다가 우연으로 시작된 안식년 같은 1년의 시간동안 매일 매일 화해를 구했다. 사회속에서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당신이, 예민함이 문제인지 매일을 고민하는 당신이, 오늘부터는 당신만을 위해 내면을 정리 할용기를 내었으면 좋겠다. 타인에게 허락을 구하는 일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화해를 건네는 일 말이다.

#예민함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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