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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y 02. 2024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

"승준, 오늘도 숙제를 안 했니?"


학원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에게 인사겸 말을 건다. 문을 여는 속도가 느린 아이의 얼굴을 보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인데 눈빛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불안한 얼굴이다. 뜨문뜨문 어색한 발걸음을 딛고 걸어온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고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본인 입으로 숙제를 못했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 누가 먼저 혼내기 전에 내가 먼저 아이의 언어를 대신한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숨을 삼키는 아이를 바라본다. 얼굴이 점차 붉게 변한다. 


나는 부리나케 아이의 어깨를 잡고 아무도 없는 교실로 데러 간다. 그 순간에 빨리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면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우는 자신을 보고 더 부끄러워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상처는 내가 빨리 아이를 데려간다면 받지 않을 수 있다. 빈 교실의 문이 닫히며 철컥- 소리가 나자 공간이 조용했다. 어디 편하게 앉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삼켜 운다. 하지 못한 대답이 많지만, 하고 싶은 말도 많아 보이는데 그걸 차마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제 나름은 억울하고 슬프다. 휴지를 가져다주고 나는 말없이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준다. 


쏟아낸 슬픔이 휴지 한가득 번진 눈물로 쌓여갔다. 휴지가 쌓이자 아이는 가쁜 호흡을 골라 쉰다. 이제 내가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은 얼굴이다. 낮은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을 건다.


"왜 숙제를 하지 못했는지 선생님에게 얘기해 봐."




학생들이 해야 하는 과제 양이 많기로 소문난 학원에서 일을 했다. 학생들의 과제 양과 선생들의 노동량도 정비례했던 업무 환경에서 수없이 많은 할 일을 해내느라, 서로 마음의 안부를 묻기란 사치 같았다. 내가 겨우 12살 난 아이에게 매일 묻는 말은 숙제를 했냐는 질문이었다. 본인은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데 과제량은 너무 많고, 학원에 오면 매일 낙제점수를 받아해야 하는 숙제는 더욱 쌓여가니 시간은 더 없는 것이다. 아무리 퍼내도 줄어들지 않는 우물의 물처럼, 학원을 다니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이에게 우물과 같았다. 친구 같은 선생과 거리가 멀었던, 나는 일명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약간의 위압이 드는 선생님 앞에서 제 몸이 아프고 마음이 힘들어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숙제를 못했다는 말을 차마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날 오후, 나는 내가 해야하는 업무를 미루고 한참을 그 아이와 교실에 앉아 문제를 해결했다. 다른 학원에서 해야하는 스케쥴과 본인이 하고 싶은 놀이를 모두 적고 요일별로 해야하는 일을 적절하게 나누었다. 한 번에 몰아서 모든걸 하지말고, 월요일에 해야 하는 일과 금요일에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놀고 싶을 때도 어떻게 해야할지 함께 정했다. 밀린 숙제는 적당히 줄여주고 오늘 하루를 잘 보내자고 약속했다. 


새빨갛게 익어 물러진 홍시같은, 힘 없이 쳐져있던 얼굴 결이 편해보였다. 아이는 눈물을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모르는 과제 해결법을 알게 되었고, 무섭기만 했던 사람의 친절을 보고나닌 마음도 편해져보였다. 흘린 눈물을 닦은 휴지를 손에 쥐고 나가며, 아이는 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나와 학생이 단 둘이 교실에 있는 장면은 그 후로도 학생의 얼굴만 바뀐채로 몇 번이 반복되었다. 학생은 울고, 나는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날이 반복 될 때 밤잠을 자지 못했다. 내 마음은 아프고, 불편하고, 미안하고, 죄스러운 감정으로 뒤섞여져 있었다. 


왜 학생들의 울음 앞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하루종일 학생의 울음이 마음에 걸리고 집에 돌아와 작은 내 방에 앉아 있을 때면 그 장면이 반복되어 영화 장면처럼 울렸을까. 숙제를 했냐는 질문이 아니라 오늘 기분은 어떤지 물어보는 따뜻한 어른일 순 없을까? 나는 무서운 선생님이라는 딱지 뒤에 숨어서 오랜 밤을 여리게 앓았다. 아이들의 슬픔이 마치 나의 슬픔인 마냥 끌어안고, 공감하고, 해결하려고 했다. 


들끓는 감정이 반복될 수록 지쳐갔다. 그리고 더 이상 공감하기 힘들어졌다. 공감이 되지 않아서 안하는게 아니라 너무 많은 공감을 내 안에 쌓다가 더 이상 누군가를 안아줄 힘을 잃게 되었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가족, 연인, 친구들의 문제도 해결하려는 내가 보였다. 


해야 할 업무는 쌓여가고, 해소할 감정은 많아졌으나 내게 남은건 죄책감 뿐이었다. 일을 더 잘할 수록 더욱 일을 효율적으로 하고 싶어서 생기는 조바심마저 쌓여가며 내게 인생은 총체적인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루 24시간을 보내는 동안 온건한 행복과 여유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내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조여오는 듯 했다. 


잘못한게 없지만 잘 못하는 것 처럼 느낀 30대 초반, 그 때 당시에 나는 우울을 넘어 극심한 무기력을 느꼈고 참고 사는 하루를 반복하다가 일과 사랑에 이별을 고했다. 




예민한 사람은 일과 관계에 있어서 자신이 무엇을 더 기여하고 배려할 수 있을지 찾아낸다. 남들이 신경쓰지 않는 디테일한 포인트와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한다. 내가 아는 모든 예민한 사람은 뾰족하고 신경질적인 태도가 아니라 따뜻하고 속정 넘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예민한 사람은 자신의 배려와 사랑이 인정 받지 못할 때 깊은 낙오를 느낀다. 그 중 가장 비참한 일은 자기의 예민한 모습을 모르고, 분리된 자아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타인취급하여 광대처럼 연기하는 인생을 살 때 자신을 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기여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예민한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는다. 


과거의 나는 타인의 과제를 무척이나 많이 끌어안고 괴로워했다. 선생님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한다는 태도나 기대치, 성숙한 연인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관심과 배려에서 나는 내 중심을 잡지 못했다. 공감의 스펙트럼이 넓다보니 타인의 아픔과 기쁨이 마치 나의 감정처럼 느껴졌고, 나의 책임이라 느껴졌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마치 무지개에 담긴 7가지 빛깔이 물처럼 섞여, 알 수 없는 색으로 변하는 정체 모를 색과 같았다.


그 무겁고 알 수 없는 색깔은 나를 조금씩 덮어왔고 불분명한 감정은 해소가 되지 못했다. 어떻게 이 감정을 다뤄야하고, 어디까지 타인과의 경계를 그어야 할 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단지 '나는 예민하다' 라는 문장으로 날카로워진 내 모습을 대신 설명 할 뿐이었다. 




예민한 사람은 사회적인 통념에 반박해야 하는 순간을 언젠가 한 번은 마주치게 된다. 왜 매사 그냥 넘어가질 못하고, 작은거 하나를 크게 받아 들이고, 너의 책임이 아닌 상황에 책임을 느끼며 괴로워하는지 질문 받는다. 무언가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 있다는걸 깨달을 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감각을 불신하게 된다. 내 존재에 불신이 높아지면 약간의 수치심과 함께 죄책감이 생긴다. 


나는 내 지각을 억누르는 전쟁을 하루도 몇 번씩 치루며 예민함을 억눌러살았다. 차리리 예민해 지지 않는 것이 사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나의 가장 큰 기질 중 하나를 무가치하게 만들려고 애쓴 꼴이다. 나 자신과 하나가 된 느낌으로 살지 못했으니 마음 한 구석엔 늘 패배감이 즐비했다. 


어디가서 부끄럽지 않은 공부와 커리어, 부족하지 않은 월급, 외적 조건 등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어디에도 나는 없는 것 같고, 외부 상황에 쓸려가는 나만 존재한다고 느낄 때 민감한 감각 기관은 더욱 예민해진다. 별 뜻 없는 말 한 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음식 냄새를 맡기 어려워진다. 집에 있어도 집에 있고 싶은 생각이 들정도로 지쳐간다. 예민함을 감지하는 센서가 과하게 작동되어 24시간을 쉬지 않고 돌아간다. 

일, 사랑, 관계, 오감을 예민하게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자신에게 들어오는 감각을 불신할 때, 수치심과 더불어 죄책감이 생긴다. 예민한 사람은 기존에 통용되는 사회적 통념이 유리천정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한 번쯤 반드시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천정 앞에서 좌절할 때, 내가 느끼는 감정과 사고를 극단적으로 불신하게 되고, 해서는 안될 생각과 감정을 느낀다고 여긴다. 약ㄴㅐ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과 더 행복하게 지내고, 일도 인생도 모든 나의 삶의 영역에서 나는 다 잘하고 싶었다. 내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만나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싫다는 소리를 굳이 하고 살고 싶지 않았던 그 태도는 지금 돌아보니 욕심이었다. 


학생들의 눈물과 나의 업무는 내 존재에게 건강한 감정을 선물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선생님이라면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태도도 내가 만든 상념에 불과했다. 그걸 미처 깨닫지 못해서 수많은 밤을 책임감이라는 미명하게 혼자 괴로워했다. 해결하지 못한 일에 죄책감을 느꼈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믿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그 죄책감이 쌓여갈 수록 나는 모든 일에 죄책감을 버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혼자 가둔 철창에서 살아갔다.

언제 쯤이면 이 불편한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생각하며 언젠가 있을 자유로운 날을 꿈꿨다.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가, 나를 자유롭게 할 기회가, 나를 편안하게 할 일을 만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그 자유는 외부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하고 이뤄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보호해야 할 대상을 상대하는 일에서 멀어졌고,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하는 일에서 멀어졌고, 모성애를 자극하는 사람에게서 멀어졌고, 나를 너무 성숙하게만 하는 사람으로부터 멀어졌고, 내 시간과 재능을 도둑질 하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없으면 안될 것 같았던 그 모든 것들을 버리자, 나를 옥죄던 죄책감이 사라졌다. 


짧은 인생이지만 10년을 넘게 투자한 공부를 멀리하게 되었을 때, 내가 아니면 안될 것 같은 업무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나를 사랑하던 동료와 헤어졌을 때. 나는 주체적으로 이별했고, 나를 보호할 경계를 스스로 지어내고 그 선택을 신뢰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의 나는 나의 예민함이 디테일로 살아 날 수 있는 자유로운 일을 하고 있다. 이또한 끝은 아니겠지만, 이전보다 나의 예민함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걸 알기만해도 끝없는 해방감을 느낀다.


예민함을 한껏 살려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하고, 예민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으로 창의성을 발휘하고, 꼼꼼한 기질로 내가 하는 일을 책임지고, 공감과 사랑으로 사람을 대할 때 나는 자유로웠다. 예민한 사람은 자신의 경계와 혼자 있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와 가까운 관계에게 싫다는 걸 표현해도 죽지 않는다.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이 싫다는 표현을 했을 때 상대가 싫다고 느낄까봐 불편함을 말하지 않는 일이 많다.  싫다는 표현도 드러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한 번은 어렵지만 그 다음은 쉽다. 내가 싫다고 느끼는 감정에 누군가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으므로 괜한 미안함을 미리 겪지 않아도 된다. 싫다고 느끼는 건 어딘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흐린눈 하여 모른척 할 이유가 없는 감정을 들여다보고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제거해야 한다. 




싫다고 느끼는 부분을 표현 때,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지키면 감정이 상할 일이 없다. 예민한 사람은 언어적 표현에 민감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하는 말을 부드럽고 정교하게 표현 있다. 숨을 고르고,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지 생각했고 필요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으며 효과는 좋았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나중에 결정할게요.'

'제안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 일을 할 계획이 없습니다.'

'마음은 받겠습니다.' 

'지금은 혼자서 가만히 쉬고 싶어요.'


거절 하는 연습을 하다보면 불필요한 과제와 관계를 떠 안는 일이 줄어들어 에너지의 누수를 막을 수 있다. 괜한 일에 자신을 끼워넣지 않으니 하지 않아도 될 책임을 지는 일이 없어진다. 과한 감정 이입으로 괴로워하는 일도 줄어들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존재의 부정이나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어지는 것이다. 나의 예민성을 긍정적으로 펼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인정받을 수 있고 보다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처음은 용기가 필요하고, 다음은 적응이 필요하다. 예민한 사람의 자유는 예민할 일이 없어져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주체적으로 세워갈 때 찾아온다. 



#예민함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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