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 Apr 25. 2024

나의 예민함이 싫다

햇빛이 느슨히 무거워지는 오후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향한다. 카페문을 여니 사람들의 잡담, 카페의 음악, 커피머신이 돌아가는 소리가 뒤섞여 적절한 소음이 배경으로 들린다. 오늘 앉을 자리에 가방을 올려두고 주문한 커피를 찾아 앉고,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스케쥴을 확인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머리속으로 일을 대략 구상한 뒤 본격적으로 타자를 두드리며 일을 시작한다. 여전히 내 귀에는 카페의 소음이 맴돈다. 조금 신경쓰이지만 이정도면 참을만하다. 


저 먼 시야로 중년의 여성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게 보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커피를 시킬 생각을 하지 못한채로 대화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내 눈을 다시 노트북 모니터로 돌리고 타자를 두드리며 생각한다. 


'제발 내 앞자리에 앉지 말았으면..'


발자국이 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도 내 귀에 울려퍼진다. 그들은 테이블 몇 개를 붙여 함께 앉을 자리를 만들고 아주 큰 목소리로 웃음꽃이 핀 대화를 이어나간다. 참을만했던 모든 자극이 한 번에 나를 덮치는게 느껴졌다. 커피머신이 바쁘게 돌아가는 소리, 옆자리에서 통화를 하는 사람의 목소리, 물컵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매장의 분위기를 돋구는 음악소리, 심지어 느슨한 햇빛까지도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듯 했다. 


이어폰을 끼고 손으로 귀를 잠시 막아도 나를 덮친 자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타자를 멈추고 숨을 한 번 골라쉰다. 입으로 쉬- 쉬- 소리를 내며 나의 목소리에 집중해도 바로 앞에서 높은 데시벨로 대화하는 여러개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다. 신경이 곤두선채로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쉬는 것도 아닌 상태로 시간을 보내게된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포장하고, 노트북을 정리힌다. 이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오늘 나는 내 일을 할 수가 없다. 저들에게 조용히 말하라고 지시할 권리가 나에겐 없다. 나는 이 자리를 떠날 선택만 할 수 있다. 세상은 지인들과 카페에서 대화하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도 좀 조용히 말할 수는 없을까. 친구들과의 반가운 대화도 고성방가가 아니라 적당한 밝기로 대화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저 분은 본인의 목소리가 자극적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그 목소리가 커질 때 옆에서 누가 조금만 조용히 하자고 말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온갖 스트레스를 샤워한 듯 한 몸에 받고서야 나는 카페를 나섰다. 어느새 햇빛은 어스름히 꺼져가고 나는 갈 길을 새로 찾아나간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대중교통, 서점, 카페, 강의실, 헬스장.. 내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나는 이어폰을 꼭 챙겨야 한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격이라고 느낄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특히나 시끄러운 곳보다 조용한 곳에서 소음이 들리면 몇 배나 더 힘들다. 헬스장보다 KTX 에서의 소음이 더 힘들다. 조용할 것이라 생각한 공간에서 아이의 짜증소리나 전화통화소리가 들리면 방어가 어려워서이다. 도데체 왜 여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야 하는 것인지 받아들이기 어렵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에 분노하게 된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신경쓸 것도 많은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유별나다는 소리를 밥먹듯이 듣고 자랐으며 나의 예민한 기질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들으며 성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예민함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예민함을 어떻게든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태생이 외향적이고 밝아서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땐 예민함이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예민함을 고백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고, 그럴 수록 나는 내 예민함을 숨겨야할 단점으로 받아들였다. 


예민해서 신경질적인게 아니라 화가 나는 일로 짜증이 난 것인데도 예민해서 그런거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의 기질적인 특성과 부정적인 일은 별개의 일임에도 독립된 두 사건을 묶어 평가 받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때마다 나는 모든게 내가 예민해서 생긴 문제라고 생각했다. 


상황에 대한 책임을 내 예민함으로 돌리며 살다가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나를 잃어버린 시간 동안 주체 없는 방황은 길어졌고, 다분히 외로웠다. 다시금 나다운 나를 되찾는 과정에서 내 예민함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 깨닫자 어둠이 점차 걷혔다. 여전히 어둠과 방황의 경계를 오고 가지만, 이쯤하면 괜찮은 나를 느끼는 순간이 많아졌다. 내 예민함을 제 3자처럼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겼고 예민함으로 스스로 너무 괴로운 날엔 내가 나를 살피는 방법도 알게되었으니 나의 기질을 잘 다루는 힘이 생겼다고 믿는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고, 나의 예민함을 받아들였으며, 나의 예민함을 사랑한다. 앞으로 쓸 글은 나의 예민함에 대한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한 과정과 사유를 담는다. 


이 글을 만난 모든 예민한 사람들이 조금 더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위로 받기를. 



#예민함 #에세이

작가의 이전글 밥 먹는 사이가 되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