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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y 16. 2024

단정하고 열렬한 일상을 살아가기

"벌써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고? 역시 파워 J답네!" 


한 때 엄청난 유행을 이끌었던 MBTI 로 사람들은 나에게 J 중에 J 라고 말했다. 약속을 잡거나 어딘가로 이동을 해야 할 때 미리미리 결정하고 예약을 해야 편하기 때문에 장소를 제안하거나 예약까지 도맡았다. 겉으로보기엔 계획을 좋아해서 나온 행동 같지만, 사실 내 마음은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게 더 맞는 표현 같다. 계획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 조차 예민한 사람에겐 자극적이기 때문에 이 자극을 빨리 줄이는게 좋다.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연습이 쌓이게 되고, 상황을 빠르게 소화할 수 있어서 다른 자극을 쳐낼 힘이 생겨난다. 


질서 없이 흐트러진 여러가지 일을 분류하고 넓고 좁은 범주로 구분하여 정리하는 일은 예민한 사람에게 큰 도움을 준다. 복잡한 자극으로 피로도가 높은 일상을 살아갈 때 등대와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기준을 분명히 하고 결정의 속도를 높이는일은 예민한 기질을 돋보이게 살리면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에 큰 도움을 준다.  


나의 계획적이고, 섬세하고, 정리를 좋아하는 행동 양식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카트린 조스트가 쓴 <1%의 디테일을 완성하는 센서티브의 힘> 에 따르면, 남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일정한 내적 구조를 필요로 하며, 경험한 것을 자동적으로 자신만의 가치체계에 분류해 넣는다고 한다. 세계로부터 받은 모든 자극을 나만의 분류체계로 정리해야 조화로움과 안정감을 받기 때문에 필요한 결정은 빠르게 해내고, 다른 자극도 빠르게 분류하고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외향적이고 예민한 사람은 타인과의 교류를 즐기되,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좀 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도로 민감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외향적인 동시에 사고와 감정에 관한 내향성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단정하고 열렬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


예민한 사람이 스스로를 폭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참조서, 일기


내가 느끼는 자극과 그에 따른 행동 양식, 그리고 풀리지 않는 수많은 의문, 오늘 하루도 수많은 자극에 지쳐 무슨 말을 하고, 무슨 결정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하루를 보내던 찰나였다. 매일이 다른 하루를 살지만 이 땅에 태어나 지금까지, 내가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했던 자연스러운 행동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찾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방을 둘러보니 내 책상과 책꽂이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써오던 일기가 있었다. 세어보니 갯수로는 총 32권이 넘어갔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하루를 정리하던 습관이 있었고, 일기를 쓰면서 내 세계를 눈치 없이 드러내고 감정을 표현하고 생각을 정리해왔다. 논리정연하게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을 잘해냈던 이유도 꾸준히 내적으로 나를 정리했던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한 켠이 벅차고 손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나 스스로를 지켜내고 더 잘 살아내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그걸 몰라주던게 나 였다니. 그걸 내가 먼저 알아주자 처음 느끼는 감동이 올라왔다. 나는 잊고 살만한 장면을 크게 느끼며, 그 장면에서 오는 감동을 생생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잘 깎인 연필로 글을 쓰는데에도 사각 거리는 연필의 질감을 크게 느끼고, 향긋한 아이스크림의 맛을 오래도록 음미하고,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세상을 감싸던 5월 5일 어린이날, 처음 만난 선생님과의 하루가 너무 감사해서 긴 편지를 쓰기도 하는 감수성을 지녔었다. 너무 일상적이어서 별 볼일 없는 일상을 커다란 감동과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예민한 사람의 특징임을, 이제야 알았다. 


예민한 사람은 단정하고 열렬한 일상을 살아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있다. 만약 내가 나에 대한 일기와 기록을 하지 않았다면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 했을 것이다. 방황은 길어지고 타인에게 길을 묻는 시간도 늘어났을 것이다. 시간과 자원을 아끼고, 예민한 사람을 예민한 사람답게, 예민함을 강점으로 발전 시킬 수있는데 도움 되는 일은 '기록' 이다. 


예민한 사람에게 기록은 삶을 찬란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구이다. 올해의 나는 총 5가지 종류를 기록하고 있다. 스케쥴만 적는 노트,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드는 생각을 쓰는 노트,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기록하는 노트, 오늘 했던 운동과 영양제를 쓰는 노트, 그리고 만들고 싶은 습관을 체크하는 해빗트레커이다. 


일기를 한 군데에 모두 몰아쓰는 방법도 해보았으나 일정과 감정은 전혀 다른 영역임을 깨닫고, 그 두가지를 구분하여 보는게 내 일상을 정돈하여 보기에 좋았다. 예민한 사람은 매일 같은 행동과 비슷한 생각을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자극과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어서 다채로운 일상을 사는 것 처럼 느낀다. 그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면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내적으로 차분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한 달, 6개월, 1년이 지나 남긴 기록을 되돌아보면 자신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비싼 워크숍이나 책을 읽지 않더라도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참조서를 만드는 셈이다. 기록을 할 때는 자기검열이나 완벽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한 줄을 쓰거나 쓰지 않는 날이 있더라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연습을 해야한다. 


매일 기록을 하는 시간을 가지면 혼자 있는 시간은 자동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외향적인 예민한 사람이어도 충분히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 할 수 있다. 




예민한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최대화 시킬 수 있는 풍요로운 시간, 운동


가만히 않아 모든 자극을 최소화 시키는 기록이 선행되면, 다음 날 아침 몸을 움직이는 시간을 만들자. 예민하지만 외향적인 성향을 지닌 나에게 가장 좋은 운동은 필라테스이다. 강사님이나 함께 운동하시는 분들과 교감을 할 수 있고, 온몸에 닿는 자극이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워주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피부에는 감각 수용기가 있어 우리가 느끼는 모든 피부자극을 감지하는데, 이 감각이 내부 깊숙히 느껴지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극이 만들어진다. 내게 필라테스는 이 모든 자극을 최상위의 감각으로 만들어주는 운동이다. 


필라테스 운동법을 만든 조셉 필라테스는 자신의 운동을 컨트롤로지라고 부르며 몸과 마음, 정신의 완벽한 정합이라고 정의했다.근육을 통제할 수 있는 정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 그의 주장은 내가 필라테스를 할 때도 똑같이 느낀다. 필라테스 운동법은 6가지 원리인 호흡, 중심화, 집중, 조절, 흐름, 정확성에 맞춰 진행되는데 즉 그냥 따라만 하는게 아니라 운동 내내 집중하여 몸과 정신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예민한 사람은 감각과 수용에 민감히 반응하므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나는 줌바 같은 운동보다는, 오로지 나의 몸으로 움직이는 필라테스 같은 운동이 더욱 잘 맞을 것이다. 


필라테스가 끝나고나면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내부가 샤워한듯 가뿐하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낀다. 몸의 편안함과 안녕을 위해 몸을 돌보는 시간을 갖고 나면 그 날 하루를 보낼 자신감이 생긴다. 불필요한 자극을 너무 많이 받기도 하는 일상에서, 나의 움직임으로만 자극을 느끼는 기회를 선물하는 것이다. 


예민한 사람들이 요가를 하는 이유도 비슷하다고 본다. 요가도 신체 감각을 강렬하게 인지하여 몸을 집중력의 도구로 사용한다. 복잡한 동작일 수록 집중력이 올라가니, 정신은 오히려 평온해질 수 있다. 필라테스나 요가 모두 복잡한 의식은 줄어들고 감각 기관이 살아나도록 깨우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 된다. 


베티나 토마스 작가는 감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무척 공감이 되었다. "생각이 아닌 감각을 이용해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답니다. (...) 감각의식으로부터 사고의 세계로 되돌아 나온 뒤에는 명확한 전략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행동 있습니다" **


예민한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세를 취하다보면 습관적으로 어깨를 말고, 목을 숙이고 있을 때가 많다. 긴장도가 높아서 어깨가 솟아 있을 때도 있다. 이런 자세는 등과 허리를 굽게 만들게 된다. 앉아 있을 때나 서있을 때도 긴장도가 높은 불편한 자세를 취할 때가 많은데, 나는 이런 자세를 필라테스를 통해 개선 시켰다. 일부로 척추를 곧게 펴고, 움츠러던 목-어깨-다리를 길게 펼치는 자세를 취함으로서 의도적으로 당당하고 바른 자세를 몸에 입력시키는 것이다. 필라테스는 내 몸에 든든한 영양제 같은 운동이다. 예민한 사람은 이 기질을 자신감으로 바꾸는데 도움 되는 운동 하나를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민한 사람은 수많은 자극으로 인한 피로감에 대책없이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내면의 분류체계를 설정하고 무엇을 더 크게 수용하여 받아들일지는 결정할 수 있다. 계획적이고 섬세하게, 예민함을 강점으로 키워낼 수 있는 좋은 자극을 깊게 안아내면서, 우리는 예민한 사람으로서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나의 일기와 운동은 일상을 풍요로 채우기 위한 단단한 노력이며, 대충 살지 않는 사람으로서 삶을 사랑하는 열렬함의 모습이다. 오늘 당신은, 예민한 감각을 통해 무엇으로 하루를 채워가고 있나. 나는 일기를 쓰고 운동을 하면서 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 외부의 사건을 대처없이 받아들이고 해결하려고 애쓰는게 아닌, 내가 채우는 나의 감각으로 오는 기쁨을 기록하고 느끼고 있는지를.



#예민함 #에세이



[ 참조도서 ]

*카트린 조스트,  <1%의 디테일을 완성하는 센서티브의 힘> 

** 카트린 조스트,  <1%의 디테일을 완성하는 센서티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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