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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un 16. 2020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그대로의 우리인가

왜 철학인가

20대에는 자기 계발서만 죽어라 읽었다. 당시에는 책 제목에 나이를 붙여가며 20대에는 무엇을 해라, 30대는 무엇이다, 40대는 무엇을 시작하라 와 같은 책들이 유행이었다. 책의 내용을 거의 통으로 빈 노트에 옮겨 쓰기를 할 정도로 너무 재밌는 내용들이었다. 한참을 빠져 읽고 살았으나 이 책들을 보는 게 지겹다고 느낀 순간이 생겼다. 작가들이 독하게 자수성가하여 이루게 된 삶들에 박수가 절로 나오긴 했으나 정작 내 삶에 가져올 현실적인 방법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이 많고 담력이 부족했던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마치 내 이야기가 될 것 마냥 착각했다. 그 이후 책을 읽는 시간을 확보하지 않더라도 몸으로 부딪히는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손에 펜을 쥐고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전공지식을 집어넣는다는 마음으로 고군분투했다. 1년 전부터는 고독한 사투를 멈추고 편안한 생활 속에 살고 있었는데도 자유롭지 못했다. 지하까지 떨어지는 듯한 허망함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큰 방향을 새로 잡아야 했고, 눈뜨면 내 발을 디딜 현실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꾸 직업적인 명칭으로만 나를 네이밍 했다. 정말 간절하게 대답을 찾고 싶었으나 명확한 말들이 나오지 않았다. 오아시스가 없는 사막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때, 불현듯 하나의 책이 생각났고 나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손에 잡게 되었다. 나는 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우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실존'의 얘기를 들려주는 철학을 찾았다.


왜 니체인가

2013년 6월 5일 수요일 오후 16시, 2주에 한 번씩 열리는 특강에 참여하기 위해 조금 일찍 도착하여 맨 앞자리에 앉아 특강 자료를 보고 있었다. 강연이 시작되고 러닝타임 두 시간이 지났다. 강연은 끝났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냥 나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단 앞으로 나가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연사님의 시선을 빼앗고, 직접 여쭤보았다. "1시간 후 대학원생 강의에 또 참여해도 되나요?"


몸으로 직접 부딪히기 위해 책상을 떠나고 역경을 고난을 바꾸라는 그 메시지가 매우 충격적이었다. '실천적 지식인'의 타이틀을 붙인 강연이었지만, 나는 이 분을 통해 '니체'의 메시지를 읽었다. 그렇게 유영만 교수님과 대화를 시작했으며 이 순간부터 내 삶에서 니체를 읽기 시작했다.


니체를 읽기 전, 나에게 철학자 니체는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를 죽이지 못한 모든 시련은, 나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든다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arker)
「우상의 황혼」

다소 거친 이 한 구절뿐만 아니라 그 이후 내가 기록한 니체의 메시지 또한 무거운 느낌이다.

많은 것을 말없이 쌓는 것, 불을 켜기 위해 구름으로 살자고 다짐했던 것. 모두 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한 다짐이었다. 즉, 나는 삶이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원초적 불안감은 여전하다.) 나는 내 계획에 맞게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버킷리스트, 신년 계획과 같은 모든 계획들은 인생의 퍼즐을 맞추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동력에는 불안함이 존재했다. 퍼즐 조각을 채우다 보면 언젠가는 불안이 모두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워둔 계획과 기준을 지키고 채워도, 끝이 난 그 지점에서 다시 새로 해야 하는 것들이 생겨났다. 과거의 미성숙한 나는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감정이 나의 '잘못'인 줄 알고 나의 능력만 탓했다.


인생, 그 과정 속에서 찾아오는 혼돈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불안해한다.
불확실함은 새로운 희망의 잉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새로운 도전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붓을 잡았을 땐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고 마이크를 잡았을 땐 말을 잘하고 싶었다. 영어나 독일어도 한 번 하는 김에 그냥 잘하고 싶었다. 내가 거쳐온 행위들이 일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낮게 평가했지만 이제는 해석을 새로 하려고 한다. 쉼 없이 나를 연마해온 역사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그대로의 우리가 되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힘만으로 무엇인가에 온 노력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다리로 높은 곳을 향해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에는 분명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고통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상'에 접근하고 거창한 말들을 표출하기 위해 철학책을 집어 든 게 아니다.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 니체를 읽는 것도 아니다. '니체'라는 고유명사는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나는 니체의 메시지를 통해 내 손에 망치를 들고 불필요한 것들을 깨부수며 내가 원하는 것을 다시 캐내겠다고 다짐한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 그 안으로 "질문"을 들고 들어가겠다. 언젠가 니체 자체를 버리고 니체를 잊게  때를 찾기 위해, 니체를 시작한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이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버리고 너희를 찾도록 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참조 도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유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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