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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ul 02. 2020

얘야, 매번 잘하려고 할 필요 없단다

선생님 저 대학 합격했어요!

수능날은 아침부터 시작해서 그날 하루가 끝이 날 때까지 종일 긴장된다. 특히나 영어영역이 시작되고, 시간에 맞춰 문제지가 탑재되면 부리나케 다운로드해서 풀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고3 애들 얼굴이 둥둥 떠다닌다. '아 왠지 이 문제는 여기서 많이 헷갈렸을 것 같은데', '이 문제는 대놓고 틀리라고 만들었네'와 같은 생각을 하며 혹시나 애들이 문제가 낯선 나머지 긴장해서 제 실력을 드러내지 못할까 봐 걱정을 한다. 이럴 땐, 평소에 잘해왔던 학생들보다 실전에 대한 두려움에 민감했던 아이들의 얼굴이 훨씬 더 많이 떠오른다. 단기간 동안 본 애들도 아니고, 3년을 함께 영어 시험을 쳐 온 애들이다. 학교 내신시험이나 모의고사를 치르며 A는 어떤 성격을 가졌고, 어느 부분이 강하며 B는 또 어떠한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중에서, J 양은 수능이 끝난 후 소식이 가장 궁금한 학생이었다. J는 성격이 밝고 유쾌하며, 교우관계가 좋았다. 학생 회장으로 3년을 보내며 학업도 잘 챙겼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강해 보이는 아이였으나, 속내는 마냥 여렸다. 성적을 잘 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 보니 시험기간만 되면 늘 아팠다. 그래서 나는 우스갯소리로 'J가 아프기 시작하면 그땐 시험기간 시작이다! 울 J가 안 아프면 그건 시험기간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런 농담을 통해 잠시라도 덜 힘들었으면 했다. 어른들에게 예쁨도 받고 싶고, 잘한다는 말도 듣고 싶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도 하고 싶으며, 친구와도 의리 있게 잘 지내고 싶은 순수한 아이였는데 워낙 학교 시험도 어렵고 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등학교 3년은 꾀나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무사히 3년을 잘 버텨내고, 수능을 잘 치고 나면 대학에서 또 다른 경쟁을 해야겠지만 그래도 1학년 신입생이라는 부푼 기대와 함께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특권으로 빨리 내 보내고 싶었다. 수능이 끝나고 한 달 뒤, 다소 늦게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J는 "선생님 저 대학 합격했어요!"라는 카톡을 보내주었다. 



"너무 어렵지만 재미있어"

이 친구의 합격 소식이 유난히 기뻤던 이유는, 성격에 맞지 않는 내신 공부가 아니라 본인이 하고 싶은 생명공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시작하는 대학 전공 공부가 쉽지는 않겠지만, 힘들더라도 재밌다는 생각으로 임할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J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자신에 대한 기대치도 높은 학생이었다. 그래서 노력이 무마되는 순간에 많이 힘들어했다. 열심히 암기했는데도, 성적이 안 나올 때 속상하지 않을 학생은 없지만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유난히 더 아플 것이다.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집중할게 아니라, 노력을 했다는 것이 더 가치가 있고 그리고 너는 매번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고3 마지막 수업 날, 아이는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 이름을 불러주며 자신의 마음을 물어보고 매번 잘하려고 할 필요 없다고 위로해줬던 게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했다. 너무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제도권 시험에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던 이 학생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매번 잘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할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알고 갔다는 게 더할 나위 없는 감동이었다. 


고정 마인드셋을 가진 학생들에게서 우울증이 더 많이 발견됐지만, 우울증의 절정기에는 성장 마인드셋의 소유자들도 많은 수가 비참함에 빠져들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정말 놀라운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학생은 우울증이 심할수록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더 많이 보이고, 과제도 더 열심히 하고, 자신의 생활도 더 적극적으로 관리했습니다. p.68


J에게는 실패가 너의 존재를 규정짓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고, 다행히 그 메시지를 빨리 이해한 학생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서 또 많은 좌절과 고통을 겪으며 여린 마음을 부여잡겠지만 아마, 그냥 마주하고 처리할 것이며 그로부터 배움을 얻을 학생이 될 것 같다. 혹시나, 마음이 불건강해져서 책에서 말하는 고정 마인드셋이 강해지는 시기가 온다면 비단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이 아이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회복하고 나면, 아이는 자신의 인생을 두고 말할 것 같다. "너무 어렵지만 재미있어."라고. 



ps. 어제 방학이라고 잠시 찾아왔는데, 그냥.. 공부하지 말고 연애나 좀 했으면 한다. 진심이다. J야, 나가 놀아라.  


<참조 도서>

「마인드셋」-캐럴 드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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