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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ul 11. 2020

영어선생이 단어장을 안 보는 이유

어휘 33,000개가 수록된 단어장 2권을 수도 없이 회독했다. 토익, 토플은 물론 수능과 공무원 시험에 쓰이는 단어, 더 나아가 GRE와 SAT에도 기출 된 단어들도 함께 있다. 어휘가 부족하니 지문을 읽기가 어려웠고, 처음엔 고등학생용 수능 단어장으로 가볍기 시작하여 고시생 말년(?)이 되자 처음 보는 단어의 비율을 줄이기 위해 어휘를 따로 공부하는 시간을 두었다. 영어 임고생들에게 인기 있는 두 권의 어휘책을 찾아 서점으로 가서 두 책을 비교했다. 수험생의 90%가 사용하는 A라는 책을 사용하는 게 스터디엔 유리했으나 내 눈에는 B라는 책의 가독성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책의 가격도 비쌌고, 두껍고, 공부해야 할 양이 많으므로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가독성이 떨어지면 단어책이 보기 싫어질까 봐 (그냥 봐도 보기 싫게 생김..) 거부감이 적은 B를 선택했다. 그때 당시에도 선택 기준은 이러했다.


단어가 문장에 적용된 연습문제가 조금 더 많은가?

유의어의 개수가 조금 더 많은가?

단어에 대한 설명을 해 두었는가? (단어 자체의 뉘앙스를 설명했는지)


책의 챕터를 따라 정해진 분량을 공부했다. 연습장에 손으로 단어의 철자를 써가면서 눈으로도 보며 단기간에 암기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당시에 나는 복습노트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단어의 경우 노트를 반으로 접어 영어단어와 한글 뜻을 함께 써놓고 영어만 보고 한글을 쓸 수 있는지를 점검했다. 다음날엔, 어제 외운 단어가 문장에 적용된 문제를 풀고, 새로운 단어를 시작했다. 철저한 1:1 대응식 암기였다.



그렇게 1년, 2년을 단어를 암기하니 책에서 광고하는 33,000 단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문에서 모르는 단어로 고생하는 일은 없어졌다. 사실 아무리 맥락으로 글을 읽어도 어휘가 부족하면 맥락으로 글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영어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단어 암기가 필수적이라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외운 것에 비해 머릿속에 33,000개 혹은 그 비슷한 아니 반틈의 단어가 남아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맥락이 기반된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알고'는 있었기 때문에 단어가 쓰인 문장으로 연습하고, 뉘앙스를 캐치하며 암기하면 효과가 좋지 않을까 믿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내 영어실력에 대한 의심을 계기로 새로운 공부 방법을 찾다가 통번역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번역을 공부하며 내가 왜 33,000개의 단어가 쓰인 단어책을 회독하고도 그 실질적인 개수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는지를 알게 되었다. 반배치고사를 치니 내 수준은 형편없었다. 임용에서 보던 지문과 비교했을 때, 훨씬.. 아니 정말 쉬운 수준의 텍스트로 시작해야 했다. 처음엔 이렇게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통번역사 선생님의 전문성과, 함께 나눈 상담의 내용을 믿기로 했다. 교재 한 권을 살 때도 고르느라 시간을 들이는 내가 이렇게 재고 따질 시간을 버렸을 만큼 실력 향상이 간절했다.


통번역을 하며 단어를 바라보는 내 시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절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참 조심스럽지만, 영어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내가 학생들이 단편적인 질문을 할 때마다 늘 "시험지 가지고 ." 혹은 "지문을 보여줘." " 문제가 쓰인 문장을 말해줘"라고 대답한다. 단편적인 정보로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땐 복잡하게 구조화된 문제가 어떻게 질문의 층계를 쌓았는지를, 무엇을 묻는지를 보아야 하고, 반드시 맥락을 확인해야 풀린다. 내가 단어 공부를 양껏 해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을 충분히 공부하지 않아서이다. 아무리 단어가 쓰인 문장을 함께 보았어도, 그 문장이 사용되는 맥락이 없으니 학습의 휘발성이 강했다.


한국의 입시 상황 상 중고등학생들에게 일말의 어휘집을 암기시키는 것을 금지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모국어와 외국어의 학습방식은 다르고, 우리나라는 영어를 제2외국어(English as a Foreign Language)로 사용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암기는 따라야 효과가 좋다고 믿는다. 하지만, 암기를 하는 과정에서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소위 양치기 공부나, 영어-한글의 뜻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공부시키는 것은 현장에서 지양했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갖고 있다.



시험공부는 끝났지만 영어 공부는 끝나지 않는다. 영어 선생이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총알 없이 전쟁터로 가는 것과 똑같다. 이미 다 공부했기 때문에 공부를 더 하지 않는다는 것은 수업에 대한 기만이다. 하지만 이젠 수업 준비를 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보이더라도 맥락에서 어떤 뉘앙스로 쓰였는지를 먼저 파악한 후, 그래도 감이 잡히지 않을 때 정리된 단어를 본다. 지문의 내용을 내 머릿속에서 그려내야, 수업 시 내 설명이 단순해지고 자연스레 학생들의 이해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험의 부담이 커진 시대에, 대부분의 교실은 암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추세지요. 사실, 법칙, 절차를 암기시켜야 학생들이 중요한 성적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봐 왔듯이, 이런 생각은 고정 마인드셋을 강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바로 그 중요한 시험에서 아이들의 성적을 저하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만큼 좋은 결과를 보증해주는 건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배움'을 곧 '암기'와 동일시하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는 듯 보입니다. (..) 암기와 진정한 이해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증가하는 추세라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만약 학생들이 더 이상 진정한 배움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p.297



수능과 모의고사 문제를 풀다가 교과서 본문의 지문을 보면 상대적으로 쉽다고 느낀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교육부가 고등학교 교과서의 본문만으로 수능시험을 치를 수 있는 제도로 바꿀 테니 학생들은 4 skills(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를 향상하도록 지문의 맥락을 이해하는 공부를 하라고 공식 발표한다면 그 반발이 어느 정도 일지 상상하기 어렵다. 아마 똑똑한 녀석들은 흔들리지 않고 수능 수준의 어려운 지문을 계속 풀고 공부할 것이다. 맥락을 파악하고 나면 문법도 어휘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발판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맥락의 힘을 믿는다. '단어'를 암기하느라 맨땅에 헤딩하는 교육 풍조가 아닌 영어를 언어답게 학습하는 환경이 언젠가는 가능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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