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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Nov 12. 2019

친구는 무당집 딸이었다.

최초의 이별


친구는 무당 집 딸이었다.


민경의 집안사람들은 모두 무당이거나 무당이 될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작두를 타는, 한국에 몇 안 남은 귀한 큰 무당이었고, 삼촌은 무속에 남다른 재능은 없지만 말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모는 젊은 무당이었고, 작은 이모는 인천 배다리 아기 무당으로 불렸다.


아이들은 민경을 선무당이라고 불렀고, 귀신 붙은 년이라고 돌을 던졌다.



민경이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었다. 세 살 터울의 오빠는 엄마가 새로운 남자와 살림을 합치면서 데려갔다.

아들이기에 선택받고 딸이라는 이유로 누락된 민경이는 무당집 주방 옆방에서 쪽잠을 자고 굿을 하고 난 뒤 남은 음식을 먹고 자랐다.



민경이 집을 가려면 우리 동네를 통과해서 산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다.


동네 길로 다니지 말라고 으름장을  것은 같은 학교 아이들과  학부모들이었다.


 부모 밑에서 자란 남자아이들은 학교가 끝나고 동네로 향하는 민경이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툭하면 민경의 손이 까졌고, 어떤 날은 이마나 볼에 피가 나기도 했다.


땀을 닦듯, 익숙하게 옷소매로 피를 닦아내는 민경이를 막아 세우고 신발주머니를 휘둘러서 애들을 내쫓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키가 크고 발육이 좋았던 나는 남자아이 두셋쯤은 가뿐하게 밀어서 넘어트릴 수 있었다. 아이들을 따돌리고 민경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가면 엄마는 우리를 씻기고 밥을 차려주었다.



민경이는 어른처럼 가장 크고 파란 풋고추를 집어서 쌈장에 찍어먹었고, 아빠처럼 흰밥에 배추김치 이파리를 싸서 먹었다.


나는 국에 들어간 파도 안 먹는 아이였지만, 민경이와 함께일 때는 생양파나 마늘도 먹었다.



우리는 같이 만화영화를 보고 숙제를 했고, 주말이면 같이 목욕탕에 갔다.  민경의 등을 밀어주면서  작고 마른 몸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 때를 보면서, 이러다 지우개처럼 민경이가 사라지면 어쩌지, 하는 겁을 먹은 날도 있었다. 목욕탕에 다녀오는 길이면 우리는  뚱땡이 바나나우유를  먹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민경이이었지만, 목욕을 갔다 온 날이면

지금도 냄새 ?” 라면서 자신의 머리를  얼굴이 들이밀었다.


아무리 씻어도 옷에 배어있는 향냄새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아니 하나도 안 나”


그때마다 민경은 믿지 않고, 자기 몸 구석구석 냄새를 맡았다.



유난히 까맸던 민경이 옆에 서면 내가 조금 하애 보인다는  좋았고, 여자 형제가 없는 내게 엄마 말고 같이 목욕탕  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뻤다.       



민경의 집으로 가려면 산을 넘어야 했다.


입구에서부터 진동하는  냄새에 민경이 얼굴을 찡그리고 자신의 냄새를 맡았다.  길목에 나무에는 온갖 색의 명주실이 둘러있었고, 물이 흐르는 곳에는 거위나 닭이 묶여 있었다.


어떤 날은 돼지가 시냇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날도 있었다.  굿상에 살아서 오르거나 목이 잘려서 오를 동물들이었다.


음침하고 춥고 오색실이 요란한 그 길이 나는 무서웠지만, 민경이가 있어서 다 괜찮았다. 어른들이 차를 타고 5분이면 가는 길을 나와 민경이는 손을 잡고 30분 넘게 걸려서 올라갔다.






민경이 방은 아주 좁고 추웠다. 아무리 전기장판 온도를 높여도 방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따뜻하지만 얼굴은 추웠고 숨을  때마다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밖에 있는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숨을 모아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다.


꽹과리 소리 방울소리가 끊기지 않았고 사람들의 곡소리가 이어졌다. 방문을 닫아도 주변이 시끄러워서 민경이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없지만, 민경이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듣는 쪽이었다.


최근에 산 바비인형이나, 문방구에서 보았던 것,

서울랜드에서  판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민경이는 송곳니가 삐져나오도록 히죽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손님이 사 온 병에 든 과일 주스를 훔쳐왔다.

우리 둘이서   델몬트 주스를  다섯 입만에 끝내버렸다.


 번은 청하를 오렌지 주스와 섞어 마시고는 방바닥에 물감으로 난장을 피우고,  꼬박 12시간을  날도 있었다.


(나를 찾으러 온 엄마한테 걸려서 몇 달 동안 민경이 집에 가지 못했지만, 대신 우리 집에서 놀았다.)     






민경이 서울로 이사를 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즈음 나는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집에서는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전부였다.   이상 공중목욕탕을 가지 않았고, 집에 친구를 데려오지도 않았다. 친구들과 비밀일기를 쓰느라 엄마와 친구나, 또래 집단의 일을 공유하지 않았다.




 사이 굿당에서 민경이 할머니가 쫓겨났고 박수무당이  자리를 차지했다.


 과정에서  다툼이 있었고 경찰차와 구급차가 오갔다.



새로운 길이 생겨서 더 이상 우리 동네를 통해서 굿당으로 가지 않아도 됐다. 우리가 살던 빌라는 재건축 문제로 연일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동네를 떠났다.


민경이 그 마을을 제일 먼저 떠난 사람이었고, 내가 그곳에서 가장 오래 살던 아이였다.      





민경의 부고를 들은 것은 중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처음 맞춤 교복은 너무 커서 허리에 주먹이  개이나 들어갔고,  셔츠는 오빠 것을 빌려 입은  같아서 너무 싫었다. 시골집에 있는 허수아비도 나보다 옷태가 나을  같았다.


 번이나 거울 앞에 서서 구석구석 살펴봐도 예쁜 곳이  군데도 없었다.


못난이 DNA가 매일 최고치를 경신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엄마를 찾아온 오래전 동네 할머니가 민경의 부고를 전했다. 신장이  좋아서 수술을 일주일 앞두고 급작스럽게 죽었다고 말했다.


싫다고, 걔가 누군데  신장을 주냐는 오빠를 겨우 달래서 수술 날을 잡았는데, 어린   사이를  참고 갔다고 말했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마치 애들은 들으면 안 되는 은밀한 농담을 하듯이


내가 바구니에 담은 귤을 들고 들어가자 이야기가 끊겼다.      






내가 민경이와 오가던 길은 같은  여름이 오기 전에 사라졌다.  산이 파헤쳐지고, 집들이 무너졌다.


철근이 드러나고 콘크리트가 가루가 되어 뿌연 먼지 흩날렸다.


 자리에 산이 있었고 물이 흘렀다는 것을 짐작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었고, 내 인생 최초의 이별이었다.




어디를 가도 만날  없는  이별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수신자가 없는 편지를 써서 불에 태우거나,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죄를 고백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보고 싶다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람이 죽을  있는지 신부님한테 매주 물었다.


편지도 안 닿는데 기도가 닿는다고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그런 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


매일 내 질문은 늘어갔지만, 도통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시절 나는 학교  준비를 하면서, 교복을 입어보지 못하고  시절에 멈춰있는 민경을 떠올렸다.



단추를 잠그면서, 교복 치마 후크가  칸씩 뒤로 밀리는 것을 보면서,  이상 뼈가 자라거나 살이 찌지 않는,   번도 교복이란 것을 입어보지 못한 민경이를 떠올렸다.      







20년이 지난 일이다. 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굿당이 있던 산은 고등학교가 들어섰다.


틀렸다. 십대에서 머문 민경은 그 동네를 가장 오래 기억하는 이고 나는 그보다 조금 먼저 그곳을 떠났을 뿐이다.



나는 매년 겨울 대중목욕탕에 가서 혼자 때를 밀고,  달고 인공향이 강해서 이제는 좀처럼 먹지 않는 바나나 우유를  었다. 민경이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제사 지내는 마음으로.


애석하게도 민경이와 함께 가던 그 목욕탕은 작년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고요한데 마음은  소란하고 어수선하다.   이만 때는 민경의 기일이고, 나는 아직도  비좁은 굿당  뒷방에 누운 11 민경과 , 우리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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