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초의 가출이었고, 드골공항에서 외국 남자가 독일어로 화를 내면서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외국인도 무섭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화는 내는 그도 무섭고, 그 상황도 두렵고
모든 게 슬퍼서 정말 서럽게 울어버렸다.
그 공항에서 한국인 언니를 만났다.
그녀를 따라가서 나와 동갑이었던 언니 남자친구 집에서 셋이 와인을 마셨다. 집이 정말 비좁아서 셋이 누울 수도 편하게 앉을 수도 없었다. 화장실에 앉으면 문에 무릎이 닿을 듯했고, 몸을 숙여서 머리를 감을 수도 없는 구조였다.
1.5유로짜리 와인을 몇 병을 비우다 보니 밤이 되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세모난 창으로 별이 떨어졌다. 우리는 나란히 어깨나 등을 맞대고 동이 트도록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언니의 남자 친구는 프랑스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부모가 결혼을 하지 않고 본인과 형을 낳았다고,
여기서는 그렇게 사는 게 일상이라고 말했다.
그런 말끝에 언니는 한국어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띠동갑 아래인 남자 친구와 계속 이렇게 살 수도 없어"라고 고백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프랑스 남자는 언니를 보고 웃고, 입을 맞추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
그때 나는 언니의 삶이 낭만적이고 어딘가 소설 같다고 생각했다. 언니가 울었던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울었던 것 같기도 한데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은 20살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벌써 12년 전 일이고, 그때 언니의 나이가 딱 지금의 내 나이였다.
오랜만에 주말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청소를 하고, 빨래를 널고, 환기시키려고 창문을 열다가 앞집 원룸에 등을 기대고 앉은 젊은 연인을 보고 오래전 그날이 떠올랐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새삼 잊고 있던 기억들을 불쑥불쑥 건져내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힘으로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끝에 어떤 감정은 시차를 두고 건너온다는 것을 실감한다.
삶은 낭만적이지 않고, 소설적이지도 않다. 내가 극적인 인물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동안 30대가 되었고, 그 새벽 파리의 뒷골목에서 느낀 언니의 슬픔과 설명할 수 없는 그 막막함이 나한테 시차를 두고 이제야 전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