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은 조용했다. 엄숙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아직 마지막 수업이 끝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은 선생들의 자리에는 의자들이 제멋대로 놓여있었다. 담임은 어깨를 숙이고 무엇인가 쓰고 있었다. 내가 한 발짝 뒤에 섰지만 담임은 내가 왔는지 모르고 책상에 코를 박고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쓰는지 알 순 없었다. 너무나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를 부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나에게 지나가는 선생이 무슨 일이냐고 나를 부르자 그제야 담임은 뒤를 돌아서 나를 봤다.
"어머님이 계시디?"
"아니요. 아무도 안 계시던데요."
나는 학교로 오면서 수없이 연습한 말을 뱉어냈다. 너무 작지도 그렇다고 너무 격양되지도 않은 톤의 목소리였다. 진실처럼 보이는 소리. 체육 시간에 사라진 경태가 교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그를 변호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위한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건 절대 내가 손목시계를 그놈들에게 뺏겨서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건 경태가 밝혀야 할 일이지 내가 할 게 아니었다. 나는 그의 집을 대신 갔다 왔다. 그 정도만 해도 나는 경태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한 것이다. 이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나는 경태 친구로서 수업도 못하고, 힘들게 그의 집에 가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도 만나고 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중학생인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렇게 혼자 변명했다.
담임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교실로 오자, 경태가 교무실로 불려 갔다. 잠시 후 교실에 돌아온 경태는 자리에서 땅만 바라본 채 조용히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경태는 책가방을 싸고 교실을 나갔다. 복도로 나가 그를 부르려다가 말았다. 마룻바닥인 복도를 경태는 느리게 걸어갔다. 주변에 뛰어가는 아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터벅터벅 내딛는 그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삐걱되는 바닥이 불규칙하게 들렸다. 경태가 복도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경태와 추억이다. 담임은 경태와 우유값을 잃어버린 녀석과 반반씩 우유를 나눠 먹게 했다. 그 후 그들이 우유를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경태와 더 이야기했는지도 기억이 흐릿하다. 데면데면해진 우리는 더 말을 섞지 않았다. 교실에서도 서로 다른 친구들과 놀았고 오락실에서도 그가 게임 중이면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우윳값 절도 사건은 소리 없이 소문이 퍼졌고, 경태는 공부도 못하고, 매도 맞고 가난하면서 돈도 훔치는 놈으로 학생들 사이에 낙인이 찍혔다. 반 대표 체육선수로도 그는 나가지 않았다. 영어 시간에 매를 맞고, 친구들과 티격태격했지만 운동을 잘하고 쉬는 시간이면 떠들면서 돌아다니던 경태는 말수가 줄었고, 친구들도 나도 그를 잊었다.
우유 사건은 그렇게 끝났지만, 이 일이 기억이 난 이유는 그 후 생긴 일 때문이다. 여름 방학에 참고서를 헌책방에서 엄마가 사 왔는데 우윳값을 잃어버린 녀석의 것이었다. 나는 문제를 풀다가 책 뒤 페이지에 꽂혀있는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발견했다. 지금은 왜 책에 돈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겠지만, 그 시절 어린 나는 이게 웬 횡재라는 생각에 그 돈을 갖고 바로 오락실로 달려갔다. 경태는 학기가 끝나기 전에 전학을 갔다. 소문으로는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는 소문도, 어머니가 아파서 시골에 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삼촌을 따라 지방으로 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후 경태의 소식은 어디서든 듣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러브스쿨이나 밴드가 유행해 동창들을 만나는 오프라인 모임이 생기면서 그를 찾아볼 생각도 했지만 누구도 경태의 소식을 들은 사람도 없었다.
며칠 전에 약속이 있어서 오랜만에 신촌을 찾았다. 생각보다 차가 막히지 않아 30분 일찍 신촌 근처를 가게 된 나는 어린 시절 사는 동네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가 눈에 띄었다. 중학생 시절 가던 오락실과 중고책방 등을 모두 문을 닫고 새로운 점포가 들어서 있었다. 다니던 중학교 주변은 높은 아파트가 병풍처럼 서 있었고, 중학교 앞길도 새롭게 포장되어 4차선 도로가 말끔하게 깔려 있었다. 문득 궁금해져 어린 시절 살던 집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그곳 동네만 시간을 잊은 듯 과거의 옷을 그대로 입고, 힘겹게 서 있었다. 곳곳에 재개발 반대와 유치권을 행사하는 플래카드와 벽보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경태네 집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는 군데군데 녹이 슬어 흰색이 벗겨진 봉고차가 퍼져 있었다. 썬텐이 안된 차 안은 훤히 보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짐들이 차 안에 꽉 차 있었다. 한 남자가 운전석에서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누워있었다. 차에 걸린 플래카드는 한쪽 줄이 느슨하게 되어 3구역 재개발 뒤에 글씨는 보이질 않았다. 나는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경태일리는 없지만 내 나이 또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앞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차 안에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봤다. 수염을 깍지 않고, 짧지만 뻗치는 머리카락을 한 남자는 시위 현장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을듯한 얼굴이었다. 왼쪽 볼에는 점인지 검버섯인지 알 수 없는 검은 자국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를 지나 경태네 집으로 가는 골목길과 계단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