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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군 Oct 13. 2024

[단편소설] 치약과 우유 7


  우리는 평소에 신촌과 이대까지 걸어갔다. 돈이 없기보다는 시간이 많았고, 그렇게 아낀 버스비로 오락실을 가거나 음료수를 마셨다. 그날도 경태와 나는 신촌에서 놀다가 이대 후문 봉원사 길을 걸으며 동네로 넘어왔다. 멀리 돌아오다 보니 어느덧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으슥해진 골목길에서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찹쌀떡을 파는 형들처럼 보였다. 60년대도 아닌 80년도에 찹쌀떡 장수라니! 너무 생경한 그들을 보고 지나치려고 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손짓하며 불렀다. 돈도 없어서 살 것도 없었지만 호기심에 앞으로 걸어갔다. 왼쪽에 있는 키 큰 꺽다리가 내 옆에 서서 어깨동무를 했다. 어! 뭐지. 이 친밀한 손동작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막다른 골목길이 나오자, 그들은 경태와 나를 한옥 대문 앞 계단 위에 세웠다.

  "돈 있냐?"

  밑에서 우리를 쳐다보며 키가 크고 마른 녀석이 말했다.

  "없는데요"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퍽 소리와 함께 배에서 불이 났다. 허리가 앞으로 꺾이며 고통이 느껴졌다. 그 고통은 축구 경기를 하면서 축구공에 정통으로 맞거나 선생과 엄마에게 맞던 그 쓰라림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 방이지만 처음 느껴보는 아픔이었다.

  "주머니를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한대다"

  키가 작고 통통한 얼굴이 말했다. 발밑에 선 저 얼굴을 니킥으로 날리면 통통한 녀석은 바로 넘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이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고, 심장도 쿵쾅거렸다. 여의도나 롤러장에서 날라리들에게 돈을 띠꼈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동네에서 불량배들을 만날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건 경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경태는 맞은 부위가 너무 아팠는지, 고개를 숙이고 앞을 보지 못했다. 내가 돈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자 꺽다리는 욕을 섞으며 말했다.

  "존만아! 돈이 없어도 뒤지게 맞을 줄 알아."

 그의 말이 끝나자 경태의 몸이 앞으로 수그러졌다. 어두워서인지 그들의 주먹이 빨라서인지 모르지만, 주먹이 다시 경태의 복부를 때린 후였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에 대문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문을 두드리고 살려달라고 소리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다리였다. 왼쪽 다리가 떨려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손도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답답했지만, 어서 여길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돈을 뺏기고 맞아도 떠는 나의 찌질한 모습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떨리는 손을 숨기려고 팔을 몸 뒤로 보냈다. 그 사이 꺽다리가 경태에게 다가와 주머니를 뒤졌다. 돈이 없자 꺽다리는 다시 경태의 배를 갈겼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흰색 물체를 꺼냈다. 손가락을 밀자 칼날이 올라왔다. 경태가 다급하게 외쳤다.

  "시. 시. 시계! 시계 있어요."

  나는 놀라 그를 봤다. 경태가 시계를 차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시계를 말하는 것인지 생각하는 순간 경태가 말했다.

 "얘. 시. 시. 시계 있어요. 자갸포커스! 메. 메. 메이커예요."    

 

  불량배 둘은 나와 어깨동무하고 골목을 걸어 나오며 한마디 했다.

  "신고하면 죽을 줄 알아. 니네 학교하고 반 다 확인했다."

  그렇게 14년을 살면서 가장 겁에 질렸던 10분의 순간은 아빠가 출장 가서 사다 준 시계를 제물로 바치고 끝났다. 나와 경태는 동네 골목까지 걸어오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걷고 있는 것인지 하늘을 붕 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익숙한 동네 상가가 보이자, 정신이 들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계를 뺏겨서 집에 가서 혼날 걱정보다는 경태의 고자질이 더 용서되지 않았다. 집 앞에서 헤어지기 전 경태가 작게 한마디를 했다

  "영진아 미안해."

  내가 말이 없자 그가 덧붙였다.

  "칼이 무서워서, 더 맞을까 봐 그랬어."

  씨발 새끼. 매일 학교에서 선생들에게 처맞는 새끼가 몇 대 얻어터졌다고 친구 시계를 팔다니. 고작 면도칼인데. 그게 옷을 뚫을 수나 있을까! 그걸 변명이라고 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물론 돈이 없으면 뒤지다가 시계를 뺏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들켜서 뺏기는 것과 친구의 고자질로 뺏기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겁쟁이 녀석.

  시계를 차지 말걸. 그 길로 가지 말걸. 왜 경태는 시계를 말했을까 하는 수많은 후회가 며칠 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학교에서 경태를 보면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경태는 내게 몇 번을 미안하다고 했고, 가슴골이 보이는 소피마르소 사진을 구해와 용서를 빌어 말은 섞긴 했지만, 그날 일은 마음속에 계속 한자리에 응어리져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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