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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군 Oct 06. 2024

[단편소설] 치약과 우유 5

  

  경태는 1학기가 시작할 때 창원인지 광양인지 하는 곳에서 전학을 왔다. 바가지 머리에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녔고, 메이커가 없는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그 시절 우리는 처음 만나면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신발의 상표를 보고 집이 좀 사는지, 아닌지를 먼저 파악했다. 나이키와 퓨마, 아식스, 아디다스 같은 메이커인지 월드컵과 프로스펙스와 같은 국산 신발인지 아니면 시장에서 파는 짝퉁 메이커인지 확인했다. 평소에 서울말을 쓰는 경태는 급하면 사투리를 썼고, 말을 더듬었다.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한 그는 뒷자리 떠드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한 달 전 짝이 되면서 나와 말을 섞기 시작했다. 특히 오락실에서 만났을 때 원더보이 게임기 앞에서 같이 대기를 하다가 그가 왕을 여러 번 깨는 것을 보고, 내가 왕을 깬 것처럼 기뻤다. 경태는 여러 게임을 잘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원더보이 게임도 잘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면 속도를 내며 돌망치를 던지며 벌과 뱀들을 잡았는데, 그가 자리를 잡으면 그의 손잡이 옆으로 동전이 쌓였고, 30분 넘게 게임이 이어지면 뒤에 아이들이 모여서 담을 쌓았다. 말은 없었지만 화면 상단에 계속 올라가는 점수와 죽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요리조리 빠져나오는 것을 보며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경태에게 여러 번 원더보이를 잘하는 비법을 물어봤지만, 그는 답을 피하다가 내가 어렵게 구한 왕조현 브로마이드를 주고서야 왕 깨는 법을 알려줬다. 

 

   경태는 그림 그리는 실력도 좋아서 한 번 본 자동차를 실제 모습과 똑같이 그렸다. 눈썰미도 좋았다. 그는 자동차 앞모양을 보면 바로 자동차 이름을 맞혔다. 우리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주차장에 세워져 있거나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면서 이름을 말하라고 하면 그의 입에서는 망설임 없이 자동차 이름이 튀어나왔다. 프린스, 스텔라, 쏘나타, 르망, 포니2 등 우리가 보기에는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그는 자동차의 옆모습을 보고 바로 알았다. 자동차에 대해 조금 아는 친구들도 자동차의 뒷 모양새를 보고 자동차 이름을 맞췄지만, 옆모습만 보고 자동차 이름을 맞추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특히 자동차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그게 그 모습으로 보였지만 그는 작은 디자인 차이와 모양새를 보고 자동차 이름을 알아냈다.

  하루는 궁금해 어떻게 자동차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물으면 그는 삼촌이 자동차 관련 일을 해서 그렇다고 말하면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렸다. 경태는 그의 가족에 관해서 물어보는 것은 싫어했다. 그의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 엄마가 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의 삼촌은 대학생인지 아니면 공돌인지, 데모하다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한 것들이 많을 법도 하지만 우리들의 관심사는 자동차 이름과 길 건너 학교 여고생 (절대 여중생이 아닌), 홍콩영화에서 성룡이 어떤 권법을 쓰는지와 오락실에 새로 나온 게임에서 누가 1위를 하고, 지우게 따먹기를 잘할 수 있는 비법 등에 목을 맸다. 

그  의 공책이나 교과서 귀퉁이에는 연필로 그린 자동차 모습이 많이 있었고, 어린 우리가 보기에 그는 프로처럼 보였다. 한참 만화에 재미가 붙어서 시간이 나면 졸라맨 같은 만화를 그리는 (소질은 전혀 없지만, 혼자 상상으로는 만화를 그려서 세상에 유명해진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 나는 그의 자동차 스케치를 부러워했다. 무엇인가 잘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시절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내가 보기에 경태는 공부는 못하고 선생들에게 자주 혼났지만, 세상에 대한 경험이 많은 그런 친구였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는 학교 밖으로 수업을 빼먹고 나가는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도 관심은 없었지만, 학교를 나간다는 생각에 - 특히 영어 수업을 빠질 수 있다는 생각에 - 소풍처럼 신나게 떠들며 밖으로 나갔다. 학교를 나와 10여 분 걸어서 왕복 8차선 도로가 보이는 인도에 우리와 다른 학교 학생들이 대로를 따라 쭈욱 늘어섰다. 옆 학교인 여학생들을 본다는 생각에 남학생들은 호들갑을 떨었고 선생들도 대열을 벗어나지 않으면 크게 주의를 시키지 않았다. 우리 손에는 태극기와 함께 처음 보는 나라의 국기가 들려있었다. 수업을 안 한다는 즐거움도 잠시, 대기가 길어지고 햇살이 뜨거워지면서 도로변에 앉은 우리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덩치 큰 녀석이 작은 돌멩이를 앞으로 던졌고 누군가 맞으면 뒤를 돌아보며 성질을 냈다. 그러다 던지는 모습이 들켜도 덩치 큰 녀석은 입 모양으로 욕하거나 앞을 보라는 시늉을 하면서 찡그렸고, 선생도 그냥 아이들을 방관하며 나무 그늘에서 태극기로 부채질만 했다. 나도 가끔 덩치들의 타깃이 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돌부처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면 덩치들은 몇 번 놀리다 타격감이 좋은 작은 아이들로 타깃을 돌렸다. 이건 경태가 내게 브룩실즈 브로마이드를 받고 알려준 비법이었다. 존버의 미학이라는 것이었는데, 동물의 왕국에서 알게 된 비법이라면서 존나게 정글에서 사자가 먹잇감을 찾아 기다리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면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서는 원리라고 했다. 사자는 초원에 사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려다 그의 진지한 눈빛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따가운 햇볕 속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잊어버릴 때쯤 경찰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검은색 차가 지나가면 손에 쥔 태극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창문을 열고 양복 입은 사람과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함성과 박수 소리 속에서 뒤에 누군가는 조까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함성에 묻혔는지 차 안의 양복 입은 사내는 세상에 가장 인지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수업을 안 한 날은 오후 수업도 이상하게 금방 끝나는 것 같았고 학교를 마친 뒤 돈이 없으면 나는 집 주변 철길에서 놀거나 골목에서 공을 찼다. 경태의 집은 산동네 꼭대기였고 막다른 골목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성인 어른 한 명이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이 나왔다. 그곳을 지나면 흙길 위에 삐뚤삐뚤한 아스팔트 길 끝에 작은 마당이 있는 1층 한옥이 보였다. 초록색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나왔는데 경태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방 한 칸을 빌려 살았다. 문은 미닫이였고, 부엌은 마당 한편을 플라스틱 재질로 바람을 막아 놓았는데 문도 없어서 바람이 통하는 열린 부엌이었다. 아니 그냥 캠프장처럼 요리도구를 넣고 큰 플라스틱으로 막아 놓은 것이다. 경태는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꺼렸는데 그건 자신의 부엌이 초라해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아프다는 핑계였고, 그의 집 대문에 있으면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공을 차기 위해 경태를 부를 때도 집 앞 대문에서 불렀고, 그의 집안 마당을 보는 일은 딱 두 번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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