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 말고 공유하는 센스
1. 기다림이 필요할 때는 언제일까
언제나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상대의 못된 습관이나 객관적으로도 잘못된 행동을 아무 말도 안 하고 마냥 참고 기다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적절한 언어로 정확하게 의견을 전달하고 행동을 취했다면(김치에 양념 버무리기) 그냥 기다리고 놔두는(김치 익히기)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다림이 진짜 필요할 때는 다음과 같다
1) 상대를 가만히 지켜보고 알기 위한 시간
- 아예 연애 시작되기 전 탐색기
그냥 빨리 애인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연애를 위한 연애만 득달같이 밀어붙이면, 정말 곤란하다. 우리 이제 같은 후회는 그만할 때도 됐고 솔로공포증에서 탈출할 때도 됐다. 비참한 연애는 인생을 한순간에 갉아먹지만, 쓸쓸함은 어차피 옆에 누가 있어도 평생 갖고 살 거리이다 우린 모두 혼자 태어났다. '연애인'은 따로 없다 결국 누군가의 뱃속에서 태어난 한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것이다. '내 연애 대상'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상대를 지켜보기 위해 들이는 시간을 아까워말자.
- 권태기, 상대방이 계속 짜증내고 피하고 싶어 할 때
싸움이 잦아지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짜증내고 사랑이 식은 것 같은 그 시기.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더 곁에 붙잡아 두고 싶고 집착하게 되는데, 슬프지만 이 시기야말로 거리를 두고 있어봐야 할 때다.
아무리 오래 사귀어도 우린 남이다. 자만해선 안 된다. 이 시기 거리를 두고 상대를 놔둬야 하는 건 일차적으로 그 기간 동안 그동안 내가 간과했던 상대방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헤어지기 싫다면 말이다. 마음이 사랑한다고 행동이 늘 사랑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보자.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이별은 아무리 가라고 손사래 쳐도 온다는 것을. 하지만 상대가 피로와 짜증을 있는 대로 내는 상황에서 일말의 불안감으로 자꾸만 붙어있으려고 하고 추적하면 이별은 이별대로 슬픈데 상대에게 미움도 있는 대로 받게 되면서 굉장한 모멸감을 느끼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심지어 상대가 자기 잘못은 생각 안 하고 그걸 핑계로 "이젠 숨이 막힌다", "지친다" 같은 소리를 하며 이별을 선포할 거리만 던져줄 수도 있고 그 말을 들으면 홧병이 나게된다
기억하자. 이 시기에 놔두면 돌아올 수도 있고 이별할 수도 있다.
근데 꽉 잡으려고 하면 무조건 이별하고 심지어 자존심 상하는 이별을 하게 된다.
2) 연애 중 한 사람이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나쁜 고집이나 습관을 꺾게 할 때
잔소리를 아무리 많이 해봤자 진심으로 쓸모없다. 잔소리 역치점이라는게 있는데 어느 선까지는 자기 잘못에 대한 꾸중으로 듣고 반성하려 하지만 역치점을 살짝만 넘으면 오히려 자기 잘못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잔소리하는 상대방이 자기를 괴롭힌다며 탓하게 된다. 그 '잘못'이라는 게 아무리 객관적으로 크고 위험하고 뭐 이런 건 상관없다.
그냥 듣기 싫어하면 아무리 그 말이 '맞는 말'이어도 무조건 독이 되고 나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지겨운 사람이 될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하지 말자 애초에 그 사람의 못된 습관은 내가 잔소리한다고 고쳐질 영역이 아니니까. 꼬맹이도 자기가 하고 싶은 확신이 드는 것만 하는데 어른은 오죽한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맞는 말 해도 하기 싫고 못하겠는 건 옆에서 지랄을 한다고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단호하고 정확하게 약 세 번 정도만 말하고 무섭도록 방치하는 게 제일 효과적이다.
대표적으로 이런 상황들에서 거리를 두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 대해 충분히 알려줬고, 충분히 이야기할 만큼 했다면 이제 내 정보를 상대에게 차단시키고, 나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가 생각하는 시간을 줘야 한다.
우리는 언젠가 헤어질 수도, 죽을 수도, 모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괜한 공포심도 가질 필요 없지만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해보며 서로를 대하면 괴로운 일의 팔 할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옆에서 늘 미주알고주알 대화하고 함께 있어준다면 안정적이고 행복하지만 소중함을 깨달을 '일종의 불안의 시간'을 만들어주기는 어렵다. 슬프지만 늘 곁에 있다는 안정감은 내 자식새끼한테나 줄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가끔이라도 이 불안의 시간이 있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나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 상대는 나의 감정을 헤아리길 피하게 되고 나는 점점 외롭고 고립된다.
이때는 그야말로 시간 싸움이며 누가 상대를 훤히 읽고 기다릴 때와 돌격할 때는 조절하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행동에서 진심이 나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도 상대방도 홀로 앉아 생각하는 시간 이후에 진솔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성격 급한 걸로는 우주 최고인 난 "될 놈은 뭘 해도 되고 안될 놈은 뭘 해도 안 된다"는 신조 아래 언제나 나의 스피드대로 밀어붙여왔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면 상대의 페이스도 살피며 조금만 더 천천히 시간을 들였으면 훨씬 덜 아팠을 상황들이 너무나 많았다.
기다림은 정말이지 필요하다.
2. 우린 늘 기다림에서 실패했다
참고 움직이지 않는 것의 힘을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결국 똥줄 타는 사람이 먼저 굴복하게 돼있고, 기다리는 자는 언제나 여유 있어 보인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쿨하고, 늘 초연하고, 덜 아쉽고, 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늘 좀 해보려다가 포기하곤 한다. 나는 원래가 성격이 급하고, 어차피 이래 봐야 안될 놈은 안된다는 생각에 내 시간표대로 막 밀어붙이곤 했다. 친구들은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외치고 나 또한 친구 일에서는 친구에게 늘 초연할 것을 외치지만, 자신의 문제가 되면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뭐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린 이것 역시 알고 있다.
그렇게 서두르고 달려들어봤자
안될 건 안된다는 것을
오히려 소화 안 되는 음식처럼 구겨 넣는 바람에, 나답지 않았다는 후회와 찝찝함만이 남았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질렀던 그 모든 순간들은 결국 나 자신의 급한 마음을 해결하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둘 관계를 놓고 봤을 땐 나에게 별로 득 될 것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천성은 급하고 기다림이라는 거 여태 해본 적이 없는데 대체 이제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3. 우리도 기다림 해보자
최대한 괴롭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공부를 하고 열심히 일하고 운동하고 뭐 이런 자기 일에 열심히 몰두하라는 말은 이미들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몰두를 할 수가 있어야지!? 어지간히 바쁜 사람이 아닌 이상 무조건 잊고 딴짓을 하려는 건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시간도 더디 흐르기만 한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1) 기다림 달력을 만든다
마냥 하루, 이틀 보내는 건 정말 지옥 같은 일이다. 기다림을 주 단위, 월 단위로 기한을 정해놓고 하는 게 좋다. 일주일 참은 뒤에 대화를 한번 해봐야지, 한 달 참은 뒤에 연락해야지는 마치 다이어트 기간 중 '2주에 한번 주말에는 먹고 싶은걸 먹자'처럼 기다림의 시간을 훨씬 수월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준다. 처음에 주 단위가 너무 힘들면 일 단위로 해도 좋지만 최소 3일 단위로는 침묵과 돌덩어리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연락 안 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sns로 쓸데없이 상대에게 내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줄 필요도 없다. 사라질 거면 제대로 사라지고 절간에 들어가서 이 침묵의 시간을 지켜야 한다.
2) 기다림의 덕은 반드시 존재한다 지치지 말자
나이를 먹을수록 서로 영악해진다. 내가 소위 거리두기를 한다고 해서 상대가 바로 확 무언가 변한 것 같아 보이고 저자세가 된 것 같지 않을 것이다. 혹여 그러더라도 감추고 또 감추려 하는 마음 게임 안에서 어지간한 눈치가 아니면 무슨 징후를 알아채기 힘들다. 그렇다 해서 지치고 "역시 쓸모없어 때려칠래!" 할 필요 없다. 기다림의 덕은 반드시 존재한다. 단지 시간을 충분히 갖고 난 이후에 천천히 알게 될 일일 뿐. 목적만을 생각하고 정해놓은 시간은 무조건 지킨다. 가만히 있기.
3)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다면 비밀리에 기록을 하자
일기 또는 편지의 형식으로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기록한다. 굳이 그걸 나중에 상대방에게 보여주기보다는 그냥 연락을 참지만 어딘가에 해소하는 수단으로 삼자. 생각도 정리할 수 있고 이게 쌓이면 몇 년 뒤에 내가 매번 기다릴 때마다 얼마나 생각하는 패턴이 똑같고 웃겼는지를 복기하며 성장할 수 있다.
4. 학습의 중요함: 점점 기다림이 고통스럽지 않아진다
기다림이 기다림을 부른다.
우리네 급한 성격들은 이것이 말 그대로 '성격'이라서 영영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천성적으로 느긋하고 생각과 행동이 느리고 참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선비들에 비하면 기질적인 것들은 바뀔 순 없다. 단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최소한의 숨 고르기의 시간 정도는 가져 버릇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하면 할수록 느는 일종의 스킬과도 같다는 것을 잊지 말자. 오늘 못하면 내일도 좀 어렵지만 오늘 좀 해보면 점점 더 잘하게 된다.
사랑에 온갖 열정을 쏟았던 그대여,
그대의 사랑이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오늘은 묵묵히 기다림으로 빈 공간을 채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