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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나온 Oct 10. 2024

얼려두고 싶은 따뜻함

얼려두고 싶은 따뜻함


그날은 유난히 더웠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했는데 베란다 문과 현관 중문이 다 열려있는 채로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들이 거실 한가운데 대 자로 뻗어 자고 있다. 으이그, 그렇게 문 닫고 틀라고 했더니 또 이러고 있어. 어이구.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까. 냉장실을 열어 먹을거리를 살핀다. 휴가를 앞두고 있어 장을 보지 않았더니 마땅히 해 먹을 식재료가 없다. 그렇다면, 든든한 냉동실을 열어야겠구나. 짜잔.    

 

냉동실 위쪽은 반조리 상태이거나 이미 완성된 요리들이 착착 정리되어 얼려져 있다. 그저 넣고 익히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것들로 불고기, 갈비찜, 잡채 등의 주요리부터 얼갈이 된장국, 전, 진미채 볶음 등 밑반찬까지 다양하다. 비워질 즈음 되면 새로운 메뉴로 들어차는 이것들은 친정엄마와 시어머니가 조달해 주시는 '마법의 밀키트'이다.      


냉동실 중간층은 다진 야채들과 얼린 밥들이 있다. 다진 마늘, 파 등의 요리 양념뿐 아니라 버섯, 양파, 당근, 파프리카 등의 온갖 채소를 알맞은 크기로 썰고 다져 플라스틱 냉동기에 딱딱 정리해 놓았다. 이렇게 해 두면 볶음밥이나 카레, 파스타, 리소토, 유부초밥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언제든 10분 이내 만들어 식탁에 내놓을 수 있다.     


그 아래에는 생선, 바지락, 국거리 고기, 꽃게 등의 식재료가 있고 그 외 콩가루랑 고춧가루 미숫가루 등의 각종 가루도 있다. 냉동 만두, 냉동 피자, 순살 치킨 등도 한자리 크게 꿰차고 있다.     


어떤 걸 해 먹을까. 냉동실 칸마다 바짝 정돈된 자세로 선택을 기다리는 식재료들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두구두구두구! 오늘의 저녁 메뉴는?     


"어?"  

   

불현듯 긴장을 깨는 새로운 존재가 눈에 띈다. 저기서 대 자로 뻗어 주무시는 큰아들을 한번 쳐다보고 냉동실 속 그가 넣어놨을 것이 분명한 그것을 다시 바라본다. 


    




마술 연필이 있었다. 온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연필로 원래는 실온에서 뒀다가 손에 쥐면 체온 때문에 잡은 부분의 색이 변하는 연필이다. 아들은 어디서 신기한 연필을 얻어 와서는 요리조리 만져보더니 아주 차가워지면 어떻게 되는지 보겠다며 냉동실에 넣어 둔 것이다. 여기 얼려 놓고는 잊었을 것이다.    

 

또 색종이로 접은 뒤 물을 살짝 묻혀 얼려 놓은 딱지가 있다. 물을 묻혀 얼리면 공격력이 상승한다나 뭐라나. 전투에서 아주 중요할 때만 쓰려고 귀하게 모신 얼음 딱지 되시겠다(물건에 -시-를 붙여 높이는 것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고 3학년 국어 시간에 배운다. 그러나 당시의 얼음 딱지는 우리 아들에게 -시-를 붙이기 충분할 정도로 높여야 할 귀한 인격이 분명했다). 그러나 얼음 딱지도 한 철이 지나니 찾는 횟수가 뜸해졌다. 이제 더 이상 딱지치기를 하지 않으니 이 또한 잊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이 하나 더 있다. 여기엔 아파트 단지를 뱅글뱅글 돌며 벚나무에서 따 모은 버찌가 가득 담겨 있다. 문지나 작가의 ‘버찌 잼 토스트’를 읽고 우리도 버찌 잼을 만들자고 모아 온 것인데 당장 만들 시간이 없어 우선 얼려두었다.  

   

그리고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의문의 반찬통 하나. 음, 여기에는 뭐가 들었지?

오잉? 우하하하!

빵 터졌네. 세상에, 이게 여기 있었구나!     



  

작년 초겨울의 어느 저녁쯤으로 기억한다. 가족이 외출 후 집에 돌아와 각자 자기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밀린 설거지를 했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둘이 놀았다. 남편은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외쳤다.     

"와! 눈이다!"     

정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실제 첫눈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가족이 마주한 그 겨울의 첫 번째 눈이었다. 모두가 베란다 창가에 옹기종기 모였다. 흐린 하늘 사이에서 하나둘, 눈발이 폴 폴 날리고 있었다. 무심한 사람은 발견조차 못 할 정도로 아주 조심조심 내리는 눈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첫눈이니까. 그렇게 달뜬 마음으로 우리는 잠시 내리는 눈을 구경했다.      


그리고 남편은 다시 컴퓨터로 돌아갔다. 나도 다시 돌아가 하다 만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창가에 남아 두런두런 무슨 이야기를 하며 좀 더 내리는 눈을 구경하는 듯했다.     


설거지를 마친 뒤 샤워하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내게 큰아들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엄마, 이거 봐봐."

"으잉? 으하하! 이게 뭐야!"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아이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이가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게 보여준 것은, 작은 눈사람이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눈사람.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겨우 쌓인 눈을 모아 만든 것이었다.     

"엄마 좀 더 보여 줘봐."

"안 돼. 방이 너무 따뜻해 녹을 거 같아."

"아이고 눈사람이 너무 작다. 지나가는 강아지가 밟아도 모르고 지나가겠어. 어디에다 둘 거야?"

"응, 눈사람 집에.“     


    




더운 기운이 싹 가셨다. 여기가 눈사람 집이었구나.     

아이는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올라서서는 혼자 부엌 찬장을 열었을 것이다. 그리고 플라스틱 반찬통을 꺼내서는 그 안에 엄지 눈사람을 조심스럽게 넣었겠지. 그다음에는 냉동실을 열어 냉기가 가장 잘 나오는 곳을 찾아 깊숙이 반찬통을 넣었을 것이다.     

눈사람아, 안녕?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정말 반갑다. 그동안 잘 지냈니? 눈사람 집은 맘에 들고?     

눈사람이 눈코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를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때를 기다렸다가 최고로 더운 날 ‘짜잔’ 하고 나타난 듯했다.   

       

아, 시원해!     

시원하고 귀여워. 그리고 따뜻해. 

         

사라지는 것을 꽁꽁 얼려 사라지지 않도록 집을 만들어주는 너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나도 그런 집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의 글은 냉장고라 할 수 있다.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은 찰나의 순간과 감정을 정성스럽게 정돈해 꽁꽁 얼린다. 기록은 냉동실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의 눈사람 집처럼 너의 시원하고 귀엽고 따뜻한 순간을 오래오래 보관해 주겠지.   

  

때마다 꺼내 볼 거야.

기분이 시원해지고 싶을 때마다, 귀여운 너를 떠올리고 싶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싶을 때마다.     

냉장고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얼려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가온 가을이 설렌다. 가을을 얼리자고 하면 아이는 무엇을 얼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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