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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웃고 있군. 하지만 그 웃음, 정말 너의 것인가?

웃는 남자

-빅토르위고


강제로 새겨진 웃음 아래에는, 오직 진정한 무관심만이 길들일 수 있는 공포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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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웃고 있군. 하지만 그 웃음, 정말 너의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네 얼굴에 새겨 넣은 흉터인가? 여기, 영원한 웃음의 형벌을 선고받은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름은 그윈플레인. 어릴 적 콤프라치코스라는 인간 상인들에게 납치되어, 입이 귀까지 찢어지는 수술을 받은 남자. 그 결과 그는 평생 웃는 얼굴, 즉 '웃는 남자'가 되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희극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단 한 순간도 웃지 못했다. 그의 영혼은 고통으로 신음하는데, 그의 얼굴은 군중을 향해 환희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그의 끔찍한 모습을 보며 박장대소했고, 그 조롱 섞인 웃음소리는 그의 생계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비극을 팔아 살아남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강제된 가면의 공포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에 너 자신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웃어본 적 없는가? 내면의 비명은 침묵 속에 가두고, 입꼬리만 끌어올려 괜찮은 척, 행복한 척 연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너의 얼굴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흉터다. 너 역시 그윈플레인처럼, 너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팔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가면의 저주는 네가 타인의 시선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에 더욱 강력해진다. 너는 세상의 모든 것에 신경을 쓴다. 사소한 비난, 무심한 눈빛, 변덕스러운 칭찬에 일희일비하며 감정의 노예가 된다. 끝없이 긍정적인 모습을 강요하는 세상은, 역설적으로 네가 무엇이 아닌지, 무엇이 부족한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은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현실만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피드백 루프’다.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감정의 늪.


그렇다면 이 공포를 길들일 방법은 무엇인가? 모든 것에 무심해지는 것? 아니, 그것은 냉소와 무기력일 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것을 신경 끄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신경 끄는 데서 온다. 이것이 바로 ‘신경 끄기의 기술’이다. 너는 한정된 양의 신경을 쓸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너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 네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신경을 꺼라. 타인의 변덕스러운 평가, 겉치레뿐인 관계, 허황된 성공의 기준들. 그것들은 너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기생충에 불과하다.


대신, 너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만 온전히 신경을 써라. 너의 신념, 너의 관계, 너의 성장처럼. 고통 그 자체는 피할 수 없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니까. 중요한 것은 어떤 고통을 감내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윈플레인에게 그것은 눈먼 소녀 ‘데아’를 향한 사랑이었다. 세상의 모든 조롱과 멸시 속에서도, 그의 흉측한 외면이 아닌 내면의 영혼을 봐주는 단 한 사람. 그녀를 지키는 것이 그가 선택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위해 그는 기꺼이 ‘웃는 남자’라는 고통을 감내했다. 그의 웃음은 더 이상 단순한 형벌이 아니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된 것이다.


네 가면 뒤에 숨겨진 공포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공포를 잠재울 만큼, 네가 목숨 걸고 지킬 만한 가치는 무엇인가. 세상은 네게 계속해서 웃으라고 강요할 것이다. 그 웃음이 공허한 조롱에 그칠지, 아니면 숭고한 투쟁의 증거가 될지는 오직 너의 선택에 달려 있다. 무엇에 신경을 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서 너는 홀로 서 있다.


소스:

The Man Who Laughs (Victor Hugo)

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ck (Mark Ma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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