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존 캐리루의 《Bad Blood》는 실리콘밸리의 꿈을 내세운 스타트업 테라노스 내부가 실제로는 얼마나 왜곡된 공포의 공간이었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회사는 젊은 천재 CEO 엘리자베스 홈즈의 카리스마와 혁신 서사에 매료된 인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전직 국무장관, 장군, 저명한 교수들이 이사회에 포진하며 “이 회사는 믿을 만하다”라는 신호를 외부로 발산했다. 그러나 실험실 내부의 현실은 달랐다.
혈액 한 방울로 수백 가지 검사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반복적으로 실패했고, 기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실제로는 기존의 시약 장비에 환자 혈액을 몰래 돌려야 했고, 시연회에서는 미리 녹화된 화면을 ‘실시간 결과’처럼 내보내야 했다. 연구자들이 문제를 지적하면 곧바로 해고당하거나 변호사들의 협박을 받았다. 내부 고발자조차 사설 탐정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회사의 비밀을 누설하는 순간 인생이 무너질 것이라는 공포 속에 일했다. 결국 테라노스의 실험실은 기술 혁신의 현장이 아니라, 조작과 침묵이 제도화된 공간이었다.
비슷한 장면은 《The Smartest Guys in the Room》이 묘사한 엔론 본사에서도 펼쳐진다. CEO 제프 스킬링은 매년 하위 10% 직원을 강제로 내보내는 ‘rank-and-yank’ 제도를 도입했다. 직원들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실패를 숨기며, 상사에게 충성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CFO 앤디 패스토우는 복잡한 특수목적법인(SPE)을 수십 개 만들며 부실을 감췄고, 외부 감사인 아서 앤더슨은 눈을 감았다. 수많은 규정과 회계 기준이 존재했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거짓말에 동참했다.
테라노스와 엔론, 두 조직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는 분위기였다. 제도와 규정은 존재했으나, 개인의 침묵은 그것들을 종이 조각으로 만들었다.
아툴 가완드의 《Checklist Manifesto》는 테라노스 사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그는 인간의 실패를 “무지의 실패”와 “무능의 실패”로 구분한다. 무지는 아직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무능은 이미 알고 있는 절차와 지식을 지키지 않아 생기는 것이다. 테라노스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었다. 이미 알려진 검사 절차, 교차 검증, 품질 관리, 데이터 비교, 숙련도 테스트가 다 있었지만,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만약 단순한 체크리스트라도 적용했다면 환자에게 오류가 전달되기 전에 멈출 수 있었다. 제도가 있었는데도 실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무능의 실패’였다.
댄 데이비스의 《Lying for Money》는 이런 유형의 사기를 “통제 사기(Control Fraud)”라고 설명한다.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회사 전체를 기만 구조로 만드는 것이다. 홈즈는 언론과 투자자 앞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비전을 외쳤고, 보드멤버와 투자자들은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에 압도되어 질문을 접었다. 제도가 아니라 신뢰, 비판 대신 맹신이 자리 잡은 것이다.
《Cultures of Fear》는 또 다른 설명을 덧붙인다. 테라노스에서 작동한 것은 규정이 아니라 공포였다. 감시 카메라, 불시에 이루어지는 해고, 변호사의 소송 위협은 직원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두려움이 내재화되면 사람들은 스스로 말을 아끼고, 제도보다는 생존을 우선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려움의 문화”**는 결국 제도보다 강력하게 조직을 움직였다.
앤드루 로스 소킨의 《Too Big to Fail》이 기록한 2008년 금융 위기 역시 같은 본질을 드러낸다. 당시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파생상품을 쏟아내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CDS와 CDO 같은 상품은 위험을 분산한다는 미명 아래 팔렸지만, 사실상 위험은 시스템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규제 기관은 존재했지만, 새로운 금융 상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신용평가사는 수수료 구조에 묶여 고위험 상품에도 ‘AAA’ 등급을 부여했다. 제도는 있었으나, 아무도 그 제도를 실제로 작동시키지 않았다.
테라노스와 금융 위기는 표면적으로는 다른 사건이지만 구조는 같다. 둘 다 **“제도가 있었는데 작동하지 않은 순간”**이 위기를 키웠다. 차이는 있다. 금융 위기는 제도가 너무 복잡해 따라가지 못한 집단적 무능의 산물이었고, 테라노스는 개인적 권력이 제도를 의도적으로 무력화시킨 결과였다. 전자는 시스템이 스스로의 복잡성에 짓눌린 것이고, 후자는 리더의 독선과 공포가 제도를 죽인 사례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제도와 개인의 간극이 커질 때, 시스템은 언제든 취약해진다.
여섯 권의 책이 공통으로 제시하는 교훈은 단순하다. 제도와 개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제도는 개인의 실행으로만 살아 움직이고, 개인은 제도의 틀 안에서만 안전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테라노스의 어두운 실험실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공간이었다. 창문을 가린 것은 벽이 아니라 두려움이었고, 침묵을 만든 것은 규정의 부재가 아니라 그 규정을 믿지 못한 개인의 무력감이었다. 엔론의 화려한 사무실도, 월스트리트의 고층 빌딩도 같은 본질을 공유한다. 제도는 존재했지만, 그것을 실행하고 지켜낼 개인의 용기와 환경이 없었기에 모두 무너졌다.
결국 문제는 단순히 “제도를 강화하자”가 아니다. 제도가 개인을 억압하는 구조로 작동하면 또 다른 침묵을 낳고, 개인의 양심에만 기대면 제도는 형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제도가 실제로 작동하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둘째, 개인이 심리적으로 안전하게 제도를 따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이 둘의 균형이 무너지면, 어떤 조직이든 테라노스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제도는 있지만, 개인이 무너지면 시스템은 무력하다.”
이 명제는 테라노스라는 한 기업의 비극을 넘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경고다. 제도와 개인 사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한다면, 또 다른 밀실은 언제든 탄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