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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독서라고 말해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부담주진 마세요.

by 뱅울

취미가 독서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책을 곁에 두고 외로울 때 방문하는 친구처럼 살아가는 삶을 꿈꾸었는데 현실은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에 나에게 주어진 일만 해도 빡빡해서 굳이 책을 꺼내어 차분한 마음으로 글자를 읽어나갈 시간이 없었다. 사실은 책에 내어주는 시간이 또 아까웠다. 책만큼 세상을 넓혀주는 게 없다는 것을 알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못해내니까 그게 너무 아까웠다. 오히려 책 속 글자에 온 힘을 다 쏟아서 글자로 나열된 내용을 상상해 가며 읽는 것이 또 아까웠다. 이럴시간에 해야 할 일 하나 더 해낼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작년부터 늘 마음에 독서를 두었다. 책을 읽을 시간을 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눈치만 살살 보다가 습관 어플에 올라온 다른 사람의 '10분 독서'라는 습관을 보게 되었을 땐, 아! 이거다. 싶었다. 이거구나. 내가 하루에 10분도 못 내어줄까?! 책을 읽는 것에? 그러고는 냉큼 따라서 '10분 독서' 타이틀을 달고 습관 체크항목을 하나 만들었다.


초반에는 어렵지 않았다. 책을 펼쳐서 10분 타이머를 잰 후부터 읽기 시작하기. 그러고 타이머가 끝남과 동시에 책을 덮어버렸다. 어떤 날은 겨우겨우 읽어나가는 페이지에 그 알람이 반가울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흥미로운 부분에서 정말 조금만 더 하는데 알람이 울려서 아쉬울 때도 있었다. 그렇게 10분 독서가 나에게 맞다고 생각될 즈음에 문제가 발생했다.

보통 혼자 마음먹은 것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8할이 감정 문제인데 이번에도 그랬다. 이날도 기분이 안 좋았다. 뭐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기분의 환기를 위해서라도 어디로 도피해야 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빠르게 도망칠 수 있는 세상은 책 속이었다. 10분 타이머를 맞추고 책을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었고 빠져들었던 만큼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만 갔다. 여지없이 10분 뒤 알람이 울렸다. 이놈의 시계는 융통성이 없어서 시간을 너무 칼같이 지킨다고 푸념하며 알람을 끄고 생각했다. 이런 날 많지 않은데 그냥 읽자. 책을 읽고 상상하는 데에 내 하루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날이 얼마 없는데. 그러고 두 시간을 책을 읽는 데에 써버렸다. 읽고 싶은 만큼 다 읽고 나니 그다음 날에도 다음다음날에도 책을 펴지 않았다. 10분어치 독서를 어제 12일만큼 했으니까. 하면서 10분 독서를 처음 약속한 마음을 닫고 모른척했다.

결국 습관을 만든 지 3달째, 변함없이 제멋대로인 인증칸을 보면서, 10분 독서는 실패한 프로젝트로 결론을 내렸다. 아직 나를 잘 모르는 내가 나랑 상의 없이 결정해 버린 습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도전하며 하나는 알게 되었는데. 나는 읽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8톤 트럭이 된다는 것이다. 여태껏 책을 편식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게 아니고 그날그날의 마음이 책을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 이것도 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잘 어떻게 타이르면 책을 가까이하게 만들 수 있을 것 만같은 희망이 보였다.


내가 학원에서 강사를 할 때에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를 다 만났다. 그중에 제일 어려운 학년은 초등학교 1, 2 학년이다. 생각보다 많이 여리지만 많이 강하기 때문에 그날그날 수업 전의 아이들 기분을 먼저 파악해야만 한 시간의 수업이 내내 편했다. 정말 쉽지 않은 반이 하나 있었다. 개구쟁이로 소문난 초2 남자아이 두 명과 함께 과학 실험을 해야 하는데 보고서도 함께 써야 했고 사실 그거부터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보고서에 날짜를 쓸 때부터 싱글벙글하면서 수업도 잘 듣고 실험도 잘하는데, 둘 중 하나라도 기분이 영 아닌 날에는 둘이서 투닥거리기도 하고 손이 아파서 글자를 못 쓰겠다고도 하고 실험도 하기 싫고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울상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기분이 확 좋아지는 일들 - 예를 들면 억지로 억지로 써낸 글씨를 지난주보다 더 멋지게 썼다고 칭찬해 주거나, 새로운 실험도구를 만지게 해 주는 것들 - 을 해주면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 한 시간짜리 수업을 마칠 때에는 웃으며 문밖을 나간다. "오늘도 재밌었어요 선생님~! 다음 주에 또 만나요~"

가만 생각해 보니 이게 그냥 책을 대하는 나 같은 거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된 책 읽기는 아무 문제 없이 즐겁게 마무리되지만 그렇지 못한 날에는 아예 쳐다도 보기 싫은 것. 그렇지만 어떻게 어떻게 책을 펼쳐서 읽다 보면 또 즐겁게 책을 덮을 수 있는 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10분 독서하기가 실패한 이유는 10분이라도 책을 억지로 읽어야 한다는 강제성 같은 게 나한테 느껴졌던 거다. 그래서 애초에 책을 펼치기도 싫었던 것. 참나. 이걸 더 확신하게 된 것은 지난주에 선물 받은 책 한 권 덕분이다.

지난주에는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내용이 궁금했던 책이었다. 게다가 책 선물을 주시면서 '요즘 독서도 가끔 습관 인증에 보이더라고요'라는 문장이 담긴 메모를 끼워 넣어주셨다. 아. 진짜 딱 필요한 순간에 딱 필요한 선물이라고 감탄했다. 이 책에 담긴 이만큼의 긍정이미지는 책 표지를 볼 때마다 자꾸 책을 열어보게 했다. 펼치는 게 두렵지 않았던 거다. 10분을 채울 이유가 없었거든. 마음에 안 들면 그전에라도 언제든 덮을 수 있고 마음에 들면 그 이후라도 계속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이 책을 겨우겨우 아껴서 글을 읽고 또 읽고 메모까지 해가며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다. 지하철 안에서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책을 보는 게 재미있었고,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자꾸만 들여다봤던 탓이다. 그러고 나니 확실해졌다. 부담 없이 책을 펼쳤을 때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읽는 것. 그게 나에게 맞는 독서였던 것이다.

이 모든 걸 깨닫고 나서 주 3회 10분 책 읽기 습관을 과감하게 지웠다. 그리고 매일 하는 '책 펼치기'습관을 추가했다. 하루에 한 번 책만 펼쳐보면 될 일.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1월이 시작됐다. 조급했던 10분 독서가 책펼치기로 바뀐 순간 그걸 대하는 마음이. 관점을 바꾸니까 갑자기 이렇게 행복해지다니. 역시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 올해 세 번째 책을 손에 쥐었다. 올해가 끝나가는 날, 나는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제 취미는 독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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