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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똥차게 밥 챙겨 먹기.

밥을 잘 챙겨 먹는 것만큼 나를 잘 대해주는 것은 없어서.

by 뱅울 Jan 13. 2025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밥이다. 그냥 대충 배를 채우는 한 끼 말고, 재료를 준비하고 불을 켜고 입맛에 딱 맞게 조리해서 딱 맞는 식기에 예쁘게 차려낸 한 끼. 그걸 먹으면 진짜 나한테 잘해주는 기분이 든다. 가끔 일이 너무 정신없어서 밥을 챙겨 먹는 것조차 쉽지 않고 아무거나 대충 배만 채우자 하는 날들이 찾아오면 괜히 슬퍼진다. 이거 아닌데, 내가 원하는 삶은.


 내가 어렸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그즈음 제과제빵-지금으로 따지면-공방 같은 곳에서 일을 했다. 엄마의 행보는 어린 나에게 엄청난 것들을 가져다주었는데, 엔간한 것은 집에서 만들어서 해 먹는 것의 즐거움이 그중 하나였다. 엄마는 그때 잘 먹어보지 못했던 코코넛 슬라이스를 한가득 넣은 코코넛 쿠키나, 크럼블 파운드케이크 같은 것들을 한가득 배워왔다. 마침 그때의 내키 만한 가스오븐레인지가 우리 집에 있었고, 그렇게 배워온 디저트들을 만드는 날에는 엄마의 찬장 속에 숨어있던 자주 보지 못하는 예쁜 접시들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어쩔 땐 베란다에 있는 장롱처럼 커다란 그릇장에서 디저트그릇들을 꺼내와서는 담아준 케이크도 있었다. 이런 디저트 종류 말고도 엄마의 안방 서랍장에는 레시피북 전집 같은 것이 있었고, 조리사자격증을 따면서도 다양한 양식요리들을 배워왔다. 제과제빵공방에서 가끔 요리교실을 열었고 거기에서도 심상치 않은 요리들을 한가득 배워왔다. 그리곤 집에 와서 배워온 음식들 중 유난히 맛있었던 음식을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음식과 어울리는 그릇에,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서. 이때부터 나는 예쁜 그릇에 예쁘게 담아 먹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맛있는 음식과 알맞은 식기들의 조화는 집을 금세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바꿔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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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십몇년을 살아내고서 나는 대학을 이유로 대구에서 포천까지 올라와 혼자 살게 됐다. 처음에는 기숙사에서 살았으니 밥을 늘 사 먹기만 했었는데, 첫 자취를 하게 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짐을 다 옮긴 첫날 나는 곧장 다이소에 달려가서 넓은 파스타그릇, 얕은 앞접시 같은 것들을 샀다. 파스타나 브런치 같은 것들을 예쁘게 담아 먹고 싶어서였다. 가끔은 배달 오는 음식도 좋아하는 그릇에 담아서 차려먹은 적도 있다. 그럼 뭔가 배달음식 같지 않고 내가 차려먹는 음식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조금 시간이 걸리는 요리를 하는 날(예를 들면 수육 먹고 싶어서 수육 삶다가 갓 담근 김치도 같이 먹고 싶어서 갑자기 김치를 만들어 먹은 날-세 번째 사진), 엄청 예쁜 그릇에다가 정갈하게 차려내면은 기분이 더 좋아진다. 이 한상을 차려내기 위해 내가 움직인 순간들이 떠오르고 한입 먹는 순간 온몸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때쯤부터였던 것 같다. 마음 한구석에 그런 꿈을 키워봤다. 작은 가게에 제각기 다른 모양의 예쁜 그릇들을 가지고 찾아오는 손님에게 행복한 한 끼를 내놓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꿈. 내가 맛보는 행복을 또 조금 나누고 싶어 지는 마음이 들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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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혼자 살다가 꽤 괜찮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이 사람에게도 잘 차려진 식사의 행복을 맛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가 우리 가족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나도 빵을 굽고 케이크를 만들어먹고 솥밥을 해 먹고 명절이면 갖은 전을 부쳐먹었다.(명절을 챙기지 않음에도) 그리고 점점 이 사람도 내가 차려주는 식탁을 보면서 내가 아는 그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 보일 때마다 그 덕분에 또 행복해졌다. 밥을 예쁘게 해 먹는 건 정말 멋진 일이구나. 엄마에게서 받은 그 마음을 혼자 열심히 내어 보이다가 이제는 남편에게도 선물해 주는 이 순간이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더해서 남편이 꽤나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라, 차려놓은 음식에 맞는 음악을 틀어놓고 먹기도 한다. 이건 또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는데. 이 사람의 음악 고르는 취향이 또 좋아서 내가 차려놓은 음식과 너무 잘 어울려서 가끔 이럴 때마다 감동한다. 남편을 만나면서 이 행복의 순간이 더 풍성해진 기분이 들어서.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도 취향이 가득 담긴 식기에 맛있는 음식을 내어먹는 근사한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미래에 만나게 될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이 행복을 전달해주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남편이랑 이런 얘기를 많이 한다. 고맙게도 주방용품들은 내 취향을 전부 받아주어서 예쁜 식기들을 하나 둘 사모으는 중이다. 내 취향이 좀 더 뾰족해져 가면서 원하는 기구들도 확고해져 간다. 이 모든 것들을 지켜낼 수 있는 삶을 살아나가기를. 가끔 바빠도 금세 돌아와 나를 챙겨주는 음식을 예쁜 그릇에 내놓을 수 있기를. 오늘도 기똥차게 한 끼를 차려먹을 욕심을 내어본다.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얼마 전 로컬푸드마켓에서 사 온 당근과 양배추가 보인다. 오늘은 얘들로 어떤 한 끼를 해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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