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제주도에서의 힘들었던 기억은 추억으로 미화되었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한민국 걷기 여행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4,500 km의 대장정. 그 당시에 사람들은 도대체 왜 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이번에도 나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좋아서요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나는 백팩에 텐트와 침낭 등 생존에 필요한 몇 가지 품목만 챙겨 떠났다.
해남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여행은 통영까지 이어졌다. 처음 해남을 걷기 시작했을 때 길이 너무 예뻤다. 순천, 광양, 보성, 하동, 남해를 지나며 대한민국 가을날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기에 드디어 내가 원하는 여행을 찾은 것 같았다. 마치 포레스트 검프가 계속 미국 전역을 뛰었던 것처럼 나도 미친 듯이 걸었다. 나의 걸음을 멈춘 것은 바로 ‘추위’였다. 대한민국은 4계절이 있다는 것조차 까먹고 걷고 있었다. 통영 어느 바닷가 앞에서 텐트를 치고 자고 있었는데 새벽에 몸이 오들오들 떨려서 이대로라면 얼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토끼가 겨울잠으로 겨울을 이겨내듯이 나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스키복 렌탈샵으로 도피했다. 그렇게 나의 대한민국 한 바퀴는 잠시 중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