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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의꿈 Oct 23. 2021

연애를 미디어로 배워서 그래

미디어가 그려낸 환상적 연애에 관하여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환승 연애>라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 나와 남자 친구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린다.


(여) 저 민재라는 출연자는 막 자기가 요리도 해주고 여자애한테 엄청 잘해주고 예쁘다고 말해줘. 저런 애들이 인기가 엄청 많아. 요즘은 저런 남자가 대세인가 봐.


(남) 아 저런 거 다 가짜야. 저런 남자애를 내가 현실에서 본 적이 없다. 쟤 저러다가 좀만 지나면 잘 안 해주고 완전 돌변할 걸?

(여)에? 오빠랑 오빠 친구들이 그런 스타일이 아니니까 싫어하는 거 아니냐고!


현실이 어떻든 아무튼 요새는 다정하고 성실하며 착한 남자가 인기다.


“요즘은 외모는 별로더라도 다정하고 져주는 남자가 최고야 ㅠㅠ"

“하 역시 남자는 어깨지!” "고집이 세면 정말 피곤하다구"



최근에는 로맨스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구웅이 인기다. SBS '동상이몽'에 나오는 한고은 남편이나 이지혜 남편처럼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자 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해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찾아가 아픈 그녀를 병원까지 안고 뛰는가 하면, 사귄 후에는 생일에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목걸이를 보조배터리 케이스 안에 넣어서 주는 완벽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구현한다. 다투면 여자 친구 집까지 찾아가서 사과도 하고, 자존심도 굽히며 싸움을 크게 만들지 않는다. 게다가 몸도 좋고 잘생기고 자기 일도 열심히 하는 순한 짐승? 남이다.


터프하고 남성미 남치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2000년대 인기 드라마인 <파리의 연인>이나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에 나오던 권위적인 남자 주인공과는 상반된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여성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여성들이 원하는 연애 방향과 이상적인 남자상이 미디어에 반영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다.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라나 아직까지는 남자가 가장이라는 인식이 만연하고, 여자 친구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남자도 많지는 않다. (내가 아는 한 앞에서는 사랑꾼이고 뒤에서 딴짓하는 애들도 꽤 있다) 미디어는 어쩌면 현실에 없는 캐릭터들을 계속해서 발굴하고, 여성들이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만족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내가 연애를 배울 공간은 많이 없었다. 고작해야 친구들의 에피소드, 소설, 드라마, 영화, 연애 프로그램, 연애 유튜브가 전부였다. 그래서 연애에 서툴렀을 때는 친구들을 붙잡고 시시콜콜 그 이유를 물어보았던 것 같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에게 배울 수도 없었고(?), 중학교 동창과 “키스는 어케하는거냐…?”라는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연애를 배웠다.


키스를 강의해주는 납득이 같은 친구가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편집된' 미디어에서의 연애는 항상 좋은 곳에 가서 같이 데이트를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예쁘게 차려입고 커플 사진을 찍고 카페에서 달달하게 꽁냥 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 생일 때 ‘큰 케이크와 꽃다발, 선물'을 챙겨줘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


돈가스를 통해 연애 철학을 설명하는 스윙스 (출처 개똥이네 철학관)


아마 어릴 적 나와 만났던 X남자친구분들도 그렇게 미디어가 정해준 공식 같은 매뉴얼을 따랐던 것 같다. 아마 그분들도 연애를 따로 배울 공간을 없었으리라. 그래서 '나에게 맞는 연애'가 아니라 '좋아 보이는 연애'만을 쫒았던 것 같다. 스윙스의 '돈가스'가 화제가 됐던 이유도 기존 공식을 파괴하는 연애강의였기 때문이다.


" 사실 TV는 다 가짜예요. 피디라는 사람의 연출 의도에 의해서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이라고 보기가 힘들죠. 미디어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을 편집해 보여줄 뿐입니다 "


그날 원장님은 <환승 연애>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미디어는 다 가짜라는 일침을 놓았다. 물론 나도 미디어와 문학 관련 강의를 들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방송국의 농락에 빠져버린 것이다. 헛헛한 현실을 이겨내기에 미디어를 보는 것만큼 빠른 치유도 없기 때문이다..



올해 젊은 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가 생각났다. 소설에는 영화와 문학 작품에서 여성을 다루는 편협한 남성주의적 서사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고, 연애 중심적 사고를 가진 여주인공이 나온다. 그녀는 이후 스스로 미디어의 여성 서사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결국 그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상남친 분이 연애 프로그램의 '다정한 남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해요. 우리는 모두 가부장적인 문화 아래에서 살아왔고, 여권이 목소리를 낸지는 정말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남성에게도 배려심과 이해심과 같은 특성이 필요하고,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미디어를 맹목적으로 맹신하지 않고요"


현실에는 TV와 같은 낭만적이고 환상적 연애는 없다. 싸우고 다투는 것은 일상이고 무조건 적으로 잘해주는 연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인 사이도 '관계'를 맺는 방식의 일부이고 궁극적으로는 가장 친하고 편한 '인간관계'로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미의 세포들>의 구웅처럼 싸우고 집 앞에 찾아오지 않아도, 오랜 기간 잠시 연락이 끊겼더라도,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그것은 사랑일 수 있다.


인생에 기적 같은 순간은 오긴 오지만 일상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디어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는 어떠한 기준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상담을 받으면서 이런 생각은 좀 더 구체화되었다. 내가 ‘당연하다’고 가졌던 생각들을 조금씩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주식 부자가 되어 좋은 차를 끌고, 결혼해서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그런 것만이 내 인생의 정답은 아니라고.



살아가는 방향에는 정답이 없고, 생일에 거창한 이벤트를 하지 않더라도 관계는 견고해질 수 있다는, 내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될 수 있는 상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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