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유 Sep 09. 2022

배고픈 예술가


'너는 성적도 좋은데, 그냥 계속 공부하는 건 어떠니? 예고 말고 외고 준비하자'

'야, 그림 그려서 뭐해 먹고살래?'

'예술은 돈이 안돼.'



예술 전공인 사람이라면 수도 없이 들었을 말들. 정확하게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 영어 학원 선생님, 그리고 한 명 한 명 다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이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으니 내 귀는 딱지가 앉고도 몇 번이나 새살이 돋았을 거다. 

빈센트 반 고흐를 정말 사랑하지만 ‘설마 내가 반 고흐처럼 그렇게 처절하고 불쌍한 화가가 되겠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근자감과 달리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조금이라도 돈이 되는 디자인과를 택했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는지, 나에게 미술이 어떤 존재였는지 잊었다. 나는 옛날부터 미술을 좋아했었으니까, 예고를 나왔으니까, 지금 당장 미대생이니까. 쏟아지는 과제들과 날카로운 크리틱에 휘청거리면서도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살았다.




2021년. 전공에 대한 회의와 내 실력에 대한 의구심으로 방황하는 2학년을 보냈다. 말 그대로 대2병이었다.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대충 해서 제출할 깡다구는 없었다. 매주 꾸역꾸역 어떻게든 해갔다. 인생의 반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예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신 부모님이 들으시면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다. 넌지시 엄마에게 나는 디자인 안 맞는 것 같다고, 못 해먹겠다고 흘려 말했을 때에는 역시나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냐는 뻔한 대사를 들어야만 했다.



자화상이다. 수업 듣는 내 모습. 아이디어를 내는 건지.. 머리를 쥐어뜯는 건지.. (미대생 이모티콘으로 출시하려 했었다.)



우리 학교에는 ‘쟤는 대한민국 입시를 안 겪었나?’싶을 정도로 창의적인 친구들이 넘쳐났다. ‘와, 저런 생각을 어떻게 했지?’ ‘아니 저게 사람이야? 개쩐다..’ 그런 반면, 나는 아주 작은 틀에 박혀 그저 그런 아이디어를 내는 대2병 걸린 학생이었다. ‘내가 이걸 왜 해야 돼?’ ‘난 뭘 좋아하지?’ 나는 삶에서 꽤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더욱 최악이었던 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 길을 택했는지, 디자인으로 무엇을 하려 했는지 말이다.

관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싫어했는데 그게 나였다. 그래서 싫어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기시감이 들어서.





요즘 내 삶은 나쁘지 않다. 대2병이 다 낫지 않고 시작한 3학년. 개강 후 OT를 듣다가 견디지 못해 휴학을 신청했다. 철저한 계획형인 내가 가장 충동적으로 한 일이 휴학이다. 어떤 친구는 내가 부럽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또 어떤 친구는 내가 존경스럽다고 한다. 열심히 산다고. 이러한 말들을 최근 꽤 자주 듣는다는 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의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는 증거 아닐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나 휴학하길 잘했다. 

아, 휴학 연장할까?





‘새로운 삶에 대한 대가는 과거의 삶이다.’ <굿모닝 해빗>의 저자 멜 로빈스의 최애 문장이 나의 최애 문장이 되었다. 지금의 내 삶은 처절하게 우울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보상이다. 그래야만 한다. 괴로웠던 시절을 찌질하게 기록해놓은 과거의 나에게 고맙다. 그때의 일기와 기록들 덕분에 지금 나는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으니 과거의 나에게 돌아가서 “야 좀 더 찌질하게 기록해!!!”라고 전하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번 기록하려고 한다. 23살, 백수 미대생의 날 것 그대로의 일상을.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또래 예술가들에게 전하는 어색하지만 진심이 담긴 위로와 미래의 나에게 또 다른 흑역사가 될 몇 개의 글자들.



나는 배고프지만 많이 먹는 예술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