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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 Sep 23. 2022

순간의 반짝임을 포착하는 법



3학년 개강 첫째 주.


몇 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OT는 동태눈으로 듣는다. 더더욱 눈에 빛이 없어졌다. 수업마다 대면인지 비대면인지 수십 번 확인해도 수업 직전에 공지해주는 게 국룰. 이젠 희미해진 그날도 강의실 앞에서 비대면 벼락을 맞았고 복도에서 쓰러져 오티를 들었다. 카메라의 사각지대를 찾아 딴짓을 했다. 그 수업도 전쟁 같은 수강신청 기간 동안 주운 과목이었다. 수업 명도 기억이 나질 않는 거 보니 대단히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신청했나 보다.


인쇄소에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인쇄가 완료되었어요.라고.


이거다! 내가 수업을 쨀 명분!!


그 문자를 받자마자 방전되어 있다 충전기가 꼽힌 로봇 마냥 벌떡 일어나 인쇄소로 향했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내 눈은 분명 반짝이고 있을 테다.


인쇄소에서 내 책 100권이 담긴 박스들을 받았다. 100권이 왜 이리 많아 보이는지. 상자 몇 개에 나눠져 남겨있어 내 품으로 한 번에 안을 수가 없었다. 과분한 결과물이라는 게 실감 났다. 면허가 없는 내가 이걸 서울에서 인천까지 어떻게 가지고 갈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는 탓을 했다. 당시의 연인과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로 한 시기였다.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때만 없더라.’라고 중얼거렸지만 마법의 주문은 아니었다. 자기 연민이라는 웅덩이로 기어 들어가기 직전에 인쇄소 직원분이 아이디어를 주셨다.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퇴근 시간 직전, 지금 택시를 타야 안 밀린다. 책 옮기기 대작전. 트렁크에 소중히 내 3개월치의 노력을 싣고 홀로 뒷좌석에 앉아 갔다. ‘역시 예술가는 혼자지’라고 생각하면서 택시 아저씨께서 나에게 말을 걸지 않길 빌었다. 제 눈빛 보이시죠? 저 지금 고독해요.


택시비는 어마어마했다.




집에서 100권을 혼자 검수하며 살짝씩 찢어진 부분을 붓에 풀을 발라 장인 정신으로 붙였다. 엄마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걱정해주셨지만 내 3개월의 노력을 받아 볼 내 지인들이자 후원자인 그들이 혹여나 실망할까 봐 무서웠다. 여전히 무면허인 탓에 인쇄소에 따지는 법 따위는 몰랐다. 아주 작은 쪼가리에 정성스레 풀을 발라가며 순간적으로 반짝였던 내 눈을 생각했다. 모든 책이 완벽해지자 나는 휴학을 신청해버렸다.


3월 중순, 펀딩이 배송까지 모두 마쳤다. 급커브는 지나가고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 또 표지판이 보이질 않지만 빠져나갈 길도 보이지 않으니 그냥 직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고 목표로 했던 큰 일을 마무리했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탁자에 내 책을 꺼내놓고 그 위에 반지를 올려놓고 나왔다. 성공과 실패가 이렇게도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처음 깨달았다. 내가 보지 못 했던 표지판이 있나 싶었다. 그래도 어쩔 거야. 그는 시간이 흘러 영감이 되겠지. 하며 괴로운 마음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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