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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 Sep 18. 2022

인생 무면허의 급커브



인생을 논할 만큼의 세월을 겪어 보지도 않은 스물몇 살 짜리 인간이 삶의 변화는 급커브로 찾아온다는 걸 깨달았다.



‘발.표’라는 수업이었다. (발표에 관한 수업이 아니다. 괜히 누가 날 알아볼지도 모르겠다는 관종병 초기라 수업 명은 줄였다.) 이 수업을 듣게 된 계기도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급커브가 있을 거라는 눈곱만큼 작은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여느 때처럼 폭망 한 수강신청에서 유일하게 잡은 수업이었다. 친구와 함께 수강할 작정이었지만 친구는 수강신청에 나보다 더 처절하게 실패해 나 혼자 독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업을 맡으신 교수님은 이미 1학년 때 겪어본 교수님으로 썩 나와 스타일이 맞는 교수님은 아니었다. 동태눈를 장착한 채로 OT를 들었고 친구에게 수강신청 실패하길 잘했다고, 엄청 빡센 수업이라며 오티 내용을 전달했다.


내가 속한 과는 인원이 엄청나다. 대형과 중에서도 대형과다. 이 인원들은 인기 많은 몇 개의 수업을 놓고 경쟁하고 수강신청에 처절히 패배한 인원들은 휴학을 하기도 한다. 내가 신청한 수업은 인기 수업이었고 수강신청을 한 인원의 절반도 안 되는 인원만이 금손으로 인정되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패배한 다수의 인간들은 같은 돈을 내고도 수업을 못 듣냐며 화를 내야 한다. 결국 같은 수업 명으로 다른 교수님의 수업이 열리게 됐다. 이런 일은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벌어지는 일련의 시나리오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수업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수강신청에 패배한 친구가 급하게 말을 전했다.


“야, 발표 수업 새로 생겼다. 근데 ㅇㅇㅇ교수님이야.”


헐. 내가 무지하게 듣고 싶었던 교수님. “대박"이라는 말을 외치고 나는 바로 수업을 갈아탔다. 급박하게 만들어진 수업이라 교수님의 스케줄에 맞춰 시간표가 짜였는데 화요일 밤 7시-9시였다. 야간대학인 줄.



어쨌든 그렇게 우연히도 듣게 된 야간 대학 수업에서 내 인생의 급커브를 맞이했다. 각자의 한 학기 작업물을 최종적으로 발표하는 날이었고 나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과물과 급하게 만든 피피티로 발표를 했다. 발표마다 찾아오는 지루한 긴장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제발 아무도 손을 들지 않길 바라면서 허공에 동태 눈빛을 발사했다. 하지만 내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한 한 학우분이 내 동태 눈빛이 머쓱할 만큼 반짝이는 눈으로 손을 번쩍 드셨다.


“네, 질문하세요.”


“발표 너무 잘 들었습니다. 책 내용도 좋고 제본도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혹시 판매할 생각 없으신가요?”


원본 그림들과 가제본들



나는 진심 어린 칭찬을 장난이라는 주머니에 담아 던진 질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음 최소 수량이 된다면요?ㅋㅋ”라고 대답했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질문을 했던 학우분이 나에게로 오셔서 또다시 질문을 하셨다. 책의 가격과 판매 의사 등등. 아, 이 분 지금 진심이시구나.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방향을 틀어 독립출판이라는 표지판으로 향했다.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커브길에 깜빡이도 없이 차선을 바꿨다. 나 면허 없는데… 그래도 잘 빠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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