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유진 Jul 01. 2024

갑작스런 이별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7월 초, 여름방학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날이었다.

3학년 여름방학은 개강 전 무언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된다는 압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 힘이 들어가면 더욱 막막한 법. 그날도 새로운 작업의 레퍼런스를 찾는다는 핑계로 집을 나서 동네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을 다녀오는 일은 그곳에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를 알차게 보낸 것만 같은 기쁨을 준다. 그래서 무기력한 날에 서점에 갔다 오기만 해도 나쁘지 않은 하루가 된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뚫고 가벼운 마음으로 서점에 도착하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건 심상치 않은 안내문이었다. 안내문을 읽고 또 읽었다. 어떤 이별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마주하게 된다. 당장 손잡이를 잡고 늘어져 바닥에 앉아 절규하고 싶었다.



'이거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닌지요!!

오래 만난 연인에게 언질도 없이 하루아침에 차인 느낌이었다. 가벼운 마음이 그대로 가라앉았다. 어떠한 긴장감이 가슴속에 일렁였다. 이별할지라도 너의 얼굴을 잊지 않겠다는 듯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점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유아, 베이비' 코너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나는 지금까지 왜 이 서점에서 그림책을 구경한 적이 없었을까. 그림 그리는 사람이면서. 그 좁은 책장 사이에 들어가 쭈구려 앉아서 꽂힌 모든 책을 하나씩 꺼내보며 눈에 담았다. 다리와 허리가 욱신거렸지만 좋은 작품은 계속 나왔고 사고 싶은 책도 계속 늘어났다.

평소에 갖고 싶었던 책, 그림이 내 스타일인 책, 디자인이 특이한 책, 이야기가 좋은 책,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  

무지성으로 뽑다 보니 20권 정도를 골랐다. 누가 보면 마지막 영업 맞이 세일이라도 하는 줄 알 정도로. 분명 해가 머리 위에 있을 때 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빠가 퇴근하시는 시간이 되었다. 대략 3시간 정도의 모험 끝에 두 손이 모자란 나는 아빠 찬스를 썼다. 퇴근하시며 바로 서점으로 오신 아빠께서도 문 앞에 붙은 안내문을 보신 모양이다.


“문 닫는다고 그러네?”

“응, 봤어.”


입 밖으로 내뱉으니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서점에 3시간 정도 있었는데 아빠가 오시니 2차전이 시작됐다. 혼자 서점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나를 잘 아는 누군가와 구경하는 건 몇 배로 좋다. 아빠는 재밌어 보이는 책들을 계속 나에게 건네주신다. 분명 나와 같은 책장을 보았는데, 나도 분명 시선을 두었던 책인데. 아빠의 손을 통해 건네받는 순간, 책은 새롭게 보이게 된다. 그렇게 저녁 7시까지 서점을 구경했다. 배가 꼬르륵거리다 못해 속이 쓰리고 나서야 집에 갈 정신이 들었다. 아빠와 고른 책을 다시 신중하게 검토하고 검토해서 대략 열 권 정도를 샀다. 카운터 앞에선 나는 책을 한가득 껴안았지만 왠지 공허했다. 계산하시는 직원에게 그동안 쌓인 포인트를 다 써달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직원분께서는 "잠시만요."라는 말과 함께 계속 바코드를 찍으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가 없었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늘 산 책에 대한 포인트만 5천 점이라고 하셨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깐요. 다시 오셔서 한 권 사고 5천원 할인받으시면 되죠.”


내 표정에서 서운함을 읽으셨는지 직원분은 나에게 한 번 더 오라고 하셨다.

맞다. 사실 한 달의 시간이 남아있다. 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하며 계산한 책을 아빠의 백팩에 차곡차곡 넣고 남은 책은 내가 들었다. 아빠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기분 탓이었을 수도 있지만 자꾸 정적이 흘렀다.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초여름의 선선한 저녁 바람에 아빠가 입으신 셔츠는 더 파랗게 보였고 아빠가 작아지신 게 아니라 내가 큰 거라고 그게 맞는 거라고 계속 되뇌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정을 추가했다.

7월 31일 마지막으로 부평 문고 가기.

이전 01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