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입이 문제를 망치는 이유

'감정이입의 중독'을 경계하고 '감동'하자.

by 배지영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사드립니다.


벌써 기본학교 5기가 졸업한지 반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새 기본학교 6기 접수도 끝났고요. 지난 가을에 입학했는데 올 가을을 앞두고 있다니! 무척이나 새로운 가을이 될 예정입니다.


졸업생으로 두 계절을 보내면서, 꾸준히 지적인 인내를 발휘하지 않다가는 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을 자주 느끼곤 했어요.


인간이란 더 나아지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게을러지고 싶은 나약함도 가진 존재인지라 관성적으로 살지 않으려면 스스로 지적훈련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여실히 떠올리고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지적인내, 지적훈련'이라는 표현도 이전의 저에게는 무척 쓰기 낯간지러웠던 말인데 이제는 '지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제가 되었네요.


새삼 과거의 제 글에 등장하지 않던 단어들을 쓰는 저를 보고 놀랍니다.

지금의 저는 '지적으로 사는 삶'을 다짐하며 매일 제 '지적 인내력'을 꽤 고통스럽게 성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감각적으로만 살아가는 삶을 경계하고 제대로 생각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일상에서 스스로 자주 선언해요.

이제는 지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그 노력은 다른 게 아니라 오로지 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이 사실을 알아버린 이상, 그 노력을 하지 않고서 달리 살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게 부단히 연습하다 보면 다음으로 건너가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갖고 있고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작년 10월의 저는 어떤 글들을 쓰고싶어서 브런치북 연재글 목록에 감히 쉽게 논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제목으로 공개했던 것일까요?

지난해 가을 기본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던 제가 어떤 '작은 앎'과 '작은 확신'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들이 '작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의 저는 이 중에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도 쉬이 정리해서 말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서서 '진짜 언어'로 말하고 싶다는, 두루뭉술 얼렁뚱땅 말하고 싶지 않다는 제 욕심이기도 합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빈 수레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지금 쓰는 제 글은 결코 제가 확신에 차서 쓰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건너가고픈 저의 지적훈련 과정에서 세상을 정리정돈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감정이입이 문제를 망치는 이유>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업로드하겠다는 계획을 선언한 과거의 제 행동에 책임지는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볼게요.

졸업 2주 전. 하얀 눈으로 뒤덮인 고산봉을 시린 발로 디디고 올라서서 새말새몸짓 동지들과 뜨거운 일출을 봤던 날이에요. 아름다운 세상을 맞이하고서 저보다 앞서 발자국을 내며 하산하시던 최진석 교수님이 제게 말씀하셨어요.


"공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하나는 감정이입이고 다른 하나는 감동이야.

감정이입은 대상의 감정에 흡수되는 거야. 주도권이 그 대상에게 가버리지. 그게 감정이입을 하면 안 되는 이유야.

감동은 대상을 해석하는 '나'에 감동하는 거야.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거지. 그게 감동을 해야하는 이유야. 공감을 잘 하는 게 나쁜 게 아니야. 공감능력이 좋은 건 아주 좋은 거지. 감동을 하면 돼."


걸핏하면 눈물이 먼저 고이고 세상의 변화에 감정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던 제가 '지적인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쭉 길잡이가 되어주는 이야기입니다.

덕분에 저는 이전보다 '나를 지키는' 공감을 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외부의 감정을 곧이곧대로 내 안으로 들이는 것은 지적인 공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삶의 목적은 언제나 "이 넓디 넓은 우주에서 '나'라는 인간존재가 찰나의 생을 이어가는 동안 '나' 존재의 생존의 질과 양을 높이는 것"임을 이하기에,

내 외부의 것에 주도권을 뺏긴 채 하는 말과 행동은 더 이상 내 생존의 질에도 양에도 도움되지 않고 되려 나를 향한 억압이 된다는 것을 게됐어요.


'나'라는 존재의 생도 유한하고 짧은데 그 아까운 시간 안에서 '나'의 감정마저 내가 주인이 아닌 채로 외부의 것을 받아들인다면 참 억울한 일이더라고요.

세상 모든 것은 내가 지적인 활동을 통해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니, 내 생각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감정을 느끼고 세상에 융해된 채 저를 소모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나' 주도적으로 공감이 이루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문제해결에도 더 가까워지고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질과 양이 높아진다는 것 깨달았습니다.

특히 감정이입은 가까운 대상을 향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요.

가족, 연인, 친구 등 나와 아주 밀접한 대상에게 감정이입을 과연 감정이입이 문제해결이나 관계 개선에 본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게 됐어요.


최진석 교수님 지금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다면 아주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농담으로 말씀하신 데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공감할 때의 '내 생각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대상을 사랑할수록 '본질'을 양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잠깐 마음 편하자고 본질을 놓치면 결국 모두가 힘들어지는 미래만 기다 뿐이에요.


당장 불편하다고 해서 본질을 얘기할 용기와 의지를 덮어두고 쉬운 감정이입을 통해 상황을 무하는 것은 비겁 것 아닐까요. 나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감정이입은 멀리 해야니다.

그래서! MBTI 검사하면 F(eeling) 비율 97% 나오던 제가 꽤 많이 편안하고 행복해진 비법을 공유합니.

* 물론 16가지 유형으로 사람을 일괄분류하는 것에 대해 저도 전부 동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간략히 성격을 참고할 수 있는 지표로 삼았을 때 한 영역에서 97%가 나왔을 정도로 감정이 제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알려드리기 위해 언급해요.


'나'의 주도성을 잃은 채로 이루어지는 감정이입은 필시 문제를 망치고야 맙니다. 그 공감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감각적으로 하는 공감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문제해결과 더 멀어진 상태로 이끌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지적이지 않은 공감을 하는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힘들고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어요. 자꾸 내 것이 아닌 것을 하고 있기 때문니다.


내가 하고 싶은 공감과 대상에의 감정이입을 통한 공감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른 두 가지를 같다고 여기면 그때부터는 괴리와 모순을 감당해야 해요. 인간에게 있어 괴리와 모순은 내적 분열을 일으키고 그 분열은 인간을 하나의 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해 약하고 힘들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감정이입을 통해 어떤 종류의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감정이입의 중독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감정이입을 통해 얻은 충족감은 아주 근시안적인 느낌일 뿐 결국에 시간이 흐르면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언제나 내 것이 아닌 것으로는 나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가 없어요.

저는 그 동안 감정이입에 중독된 삶을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감정이입은 순간적으로는 막강한 힘을 가집니다.


열정적인 감정이입을 통해 제가 얻었던 것들은 순간적인 투지, 순간적으로 모이는 사람들, 강렬한 단합과 배타적 연대감, 우르르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나누는 감각적 다짐, 당장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순간 힘이 세진 것 같은 착각, 치밀한 논증 없이 들이박는 행동과 같은 것들이었어요.


감정이입은 순간적으로는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어요.


앞에서부터 누차 '순간적'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속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을 짚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감정이입 후 '나'는 완전히 지워졌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말 그대로 저를 가두는 우리가 되었어요.


우리는 제 생각과 제 감정을 완전히 제한시켰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다른 감정을 느끼는 나는 반인륜적인 변절자가 되었고, 우리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는 나는 인간과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방해자가 되었습니다.


각자 배경이 어떻건, 우리는 완전히 같은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며 '감정이입으로 유지되는 집단'이었습니다.

우리로 모인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각종 행동을 도모했습니다. 우리는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전의 세상을 부수고 우리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에 도취됐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속 '나'들은 점점 지적인 존재와 멀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없고 우리만 남았습니다. '우리'를 외치는 존재들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더 강해질수록 '내'가 지적인 생각할 기회는 차단됐습니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 속 '나'들은 텅 비어갔습니다.


완전히 하나의 '우리'만 남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 안과 우리 밖을 공격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크고 강해졌지만 우리 속에는 공허한 존재들만 가득했습니다.

괴리와 모순으로 인해 분열을 겪는 '나'들은 그들이 왜 힘든지 몰랐어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나'인 줄 착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감정이입을 통해 만들어진 우리는 어느 새 왜 우리를 만들었는지조차 잊어버렸어요. 그저 우리의 의지와 투지가 꺾이기 전에 다른 투쟁의 대상을 찾 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불필요한 갈등과 사건을 만들었어요. 우리를 지키는 방법이었거든요.


어차피 우리의 존재와 활동 명분은 처음에 세웠으니 계속 동하며 우리를 유지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순간적인 만족과 성취를 징검다리 삼아 우리는 계속 목소리 냈습니다.


이미 오랜시간 공유된 감정과 생각을 기반으로, 내부적으로 도전받지 않은 채 우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습니다.

몇몇 우리 안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해왔던 저는 우리를 나오고 나서야 우리가 '감정이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감정이입으로 유지되는 사회'였다는 사실이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우리, 함께, 같이'라는 말이 참 아름다운 말이라고 여겨왔는데요. 겉만 번지르르한 말들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가치를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아름답고 정의로워보이는 말을 사용하는 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됐던 거예요.


감정이입의 중독이 참 무서운 것은 '인간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점입니다.

인정욕구가 채워질 때의 쾌락은 그 어떤 욕구보다 중독되기 쉽고 또 인간이 뿌리치기 어려웠어요.

감정이입을 통해 '우리의 스피커' 역할을 했던 경험은 참 짜릿하고 중독적이었습니다. 강한 투지와 연대감으로 불타오르는 사회 한가운데서 저는 '제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착각을 했어요.


하지만 감정이입과 인정의 쾌락에 중독된 이들도 결국에는 감정이입이 문제를 망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이입을 반복하다면 어느 새 '감정이입을 위한 감정이입' 남았다는 것을 닫게 되거든요.


더욱이 본래의 목적을 잃은 감정이입은 내부적으로 변절자와 배신자를 색출하는 데에 쓰이는 배타적 도구로 전락합니다. 분명 폭력이 싫어서 시작한 감정이입이었을 테지만 그것이 또다른 폭력을 만들고 주도하는 상황을 마주하면 허무해집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은 쉽게 감정이입하지 않습니다.


크나큰 모순 앞에서 뻔뻔함, 비겁함 혹은 무지함을 유지하기도 힘든 일이거든요. 그럼에도 그 힘든 길을 계속 가겠다는 이들은 무척 순수하거나 혹은 겁쟁이일 확률이 높습니다. '단독의 나'로 설 능력이나 용기가 없는 입니다.

제가 알게 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더 필요한 것은 쉽고 단순한 감정의 동화가 아니라 공감 기반의 부지런한 합리적 사고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게으른 감정이입을 하고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정성을 들고 있습니다.


결국 그 정성이 나를 지키고, 나의 공동체를 지키고, 세상을 지키기 때문에요.

저는 여전히 감정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전에 비해 훨씬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진정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은 감정이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감정이입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독이에, 제가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앞으로도 감정이입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세상을 사랑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그리며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감정이입을 통해 '우리'가 되는 중독에 빠져 지낸다면 스스로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세상을 위해 외치는 정의, 투쟁, 연대 같은 것들이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는지 바로 보는 정성을 기울여야 다는 거예요.


내가 하고 있는 감정이입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세상을 사랑하는 나'는 온데간데 없고 '본래의 목적은 잃고서 감정적 투쟁만 하는 나'로 살고있을지도 모르거든요.


그 현실적 모순을 인정하기 싫어서 평생 우물 속 개구리처럼 우리 안에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찰나의 생을 그렇게 살다가기에는 너무 아까워요.

나의 감정은, 내가 진정으로 두고 싶은 곳에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감동'의 시작이며, 감동이야말로 세상에 가치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공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이입이 아니라 감동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고 싶다고 오늘도 다짐합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망치는 방법은 과감히 그만 두는 것이, 지적인 인간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해요.


쉬운 감정이입으로 얻는 단기적 쾌락을 경계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며 감동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정이입을 멈추고

저에게는 매일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어요.


감정이입이 아니라 감동을 통해 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러 떠나는 은 무척 설렙니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나의 태도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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