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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 Sep 24. 2024

여보, 나는 생리중이잖아!

15Km 달리기 성공기

        다음 달인 10월초에 하프마라톤이 예정되어있고, 11월엔 풀마라톤이 예정되어있다. 내가 뛰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무모하게 티켓팅만 먼저 해두고 걱정은 그 다음에 시작하는 '선당후고'(선당첨, 후고민)의 마인드로 마라톤대회 신청만 마구 질러두었다. 10K 마라톤도 딱 작년 여름에 밥 먹다 말고 호기심으로 신청했었는데 대회 전날까지 정말 포기할까 말설이다가 우연치않게 뛰었었다. 매일 아침 초등학생 아들둘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버스정류장까지 헐레벌떡 뛰어서 버스를 타고, 다시 회사까지 헐레벌떡 1.5Km씩 뛴 내공(?) 덕분인지 10K를 포기하지 않고 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번 하프마라톤은 내가 10K를 뛰어봤으니, 그 다음은 하프지! 하고 그냥 또 무모하게 신청을 한 것이다. 11월의 JTBC마라톤도 하프를 신청하고 싶었는데 하프코스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그냥 나는 자체적으로 하프만 뛴다는 마음으로 풀마라톤을 신청해버렸다.


        내가 정말 '러너' 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뛴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페이스도 기록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 시간 안에 들어온다 이런 마음도 없다. 다만 끝까지 뛰었다 안 뛰었다 정도만 내겐 중요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전문 운동화도 내겐 과분하고, 워치도 필요 없고, 옷도 그냥 아무거나 입고 뛴다 주의였다. 10K를 뛸때도 백만년 전에 사둔 조거팬츠 긴바지에, 신발도 런닝화 아닌 4년은 족히 더 신었던 낡은 뉴발란스 515를 그냥 신고 뛰었었다. 그 날 따라 비가왔어서 물웅덩이 위를 철벅 철벅 뛰었는데 나는 비가 젖어서 내 발이 그렇게 무거운가 싶었었다.




        그런데 운 좋게 내 주위에 있는 내 또래의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들을 회사 사보 기사를 쓰기 위해 인터뷰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보 작성을 위해 카톡방에도 사람들을 초대했다. 두 시간 가량 이 뛰는 맛을 아는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도 진지하게 뛰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더니, 친구들따라 마라톤 뽐뿌가 제대로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잘 뛰는 친구들에게 하나 하나 물어보기 시작했다. 신발은 뭘 신어야 해? 공식 매장에서 사야되나 아님 네이버 같은데서 좀더 싼데서 사도 되나? 이런 자잘한 질문부터 시작해서 하프를 뛰려면 최소한 얼만큼을 미리 뛰어보면 되는지, 에너지겔은 몇키로 뛰고 먹는지, 옷은 긴바지 반바지? 이런 정말 자질구레한 질문들을 친구들이 마음 넓게 다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장비 고민의 절정은 애플워치를 살까 말까였다.


        정말 친절한 내 풀코스 완주 친구가 또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스마트워치는 필요하더라고!' 라고 친절이 친구가 말해주고, 스마트 워치중에서는 무조건 가민이 좋다고 신봉하던 까칠이 친구가 어쩐일인지 내가 '나는 가민말고 애플워치가 사고싶다.....'말해도 '애플워치도 좋다'고 컨펌을 해줘서 그날로 애플워치10을 (하필이면 출시날이었음/ 게다가 친구 찬스로 25% 할인) 질러버렸다. 지난 주말은 딱 하프마라톤 2주전이었고, 내가 15K를 뛰어내야 하프마라톤에 나갈 준비가 최소한은 되어있다고 스스로에게 안심을 시킬 수 있었다. 장비까지는 어찌저찌 갖춰서 아미노겔도 배송이 오고 애플워치도 스트라바랑 연동까지 해놨는데 이제 시간이 날까가 마지막 관건이었다.


        아들 둘의 무수리로 살면서 회사도 다니는 와중에 아침 잠이 쏟아지는 나는 정말로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야심한 10시를 넘은 그런 시점에, 남편이 첫째 아들의 숙제를 봐주고 있는 동안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둘째를 데리고 뛰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인 아들과 함께 뛴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격스럽고 즐거운 일이다. 그렇지만 몸무게가 25kg밖에 되지 않는 꼬맹이를 지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마음껏 뛸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해봤자 5-6km를 한시간에 걸쳐 같이 뛰는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기회가 지난 주말에 왔다. 가족 네 명이 다 같이 수영을 하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나의 생리가 시작되었다. 나는 원래 수영을 좋아하지만 남편은 굳이 택한다면 수영을 하기보다는 안하는 쪽을 선호한다. 그래서 보통은 내가 아들 둘을 데리고 수영을 가곤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당당했다. '여보! 나는 생리중이잖아! 어쩔수가 없네...' 내 뱃속의 위장은 웃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아쉬움만 잔뜩 남겨두었다. 뭐라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어 그래 알았어~ 착한 남편이 아들 둘을 데리고 나만 집에 남겨두고 떠났다.


        이때다 싶었다. 나는 얼른 모든 기능성 운동복들을 입고, 손목에는 새로산 애플워치10을 차고, 아식스 홈페이지에서 주문한 젤 카야노31을 신고 머리를 질끈 묶고 바로 집앞으로 나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예전과는 다르게 제법 '러너' 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애정하는 '길마중길의 시작점'으로 향했다. 날씨도 갑자기 시원해지고 달리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그래 15K를 못뛸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오늘이 대회전 10일이고 다시 이런 시간은 오기 쉽지 않으니까 되도록 뛰어보자.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다짐해본다.


        애플워치를 사기 전 핸드폰을 쥐고 5K씩 뛰었을 때는, 5K쯤 되면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내던지고 싶었다. 그렇다고 러닝벨트에 넣고 뛰자니 내가 쿠팡에서 산 나이키러닝벨트가 싸구려도 아니었건만 몸에 밀착도 안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새로산 애플워치 10 (셀룰러모델) 덕분에 핸드폰은 시원하게 집에 내던져 버리고 가끔 손목만 들여다보고 달리니 그 전과 달리 너무나 가뿐했다. 허리에 찬 힙색에는 아미노젤 딱 하나 들어있으니 찬듯 만듯해서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도 솔솔 불어주니 6키로까지는 가뿐하게 뛰었다. 고비는 6키로쯤 달릴때 너무 목이 말라왔는데 그때는 '나는 7키로에 아미노젤을 먹을꺼야!!'라는 생각으로 가스라이팅을 시작했다. 평소에도 물을 별로 안마셔서 그런지 6키로가 넘어가자 목이 급격히 말라서 죽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입으로 이상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나~는~ 7 키로에~~~ 젤~~을~~ 먹을꺼예요~~~ 나~~ 는~~~ 7키로에~~~ 에너지젤을~~~ 먹을수있다~~~' 할머니들처럼 듣도 보도 못한 노래를 지어서 가사에 희망을 담았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 중얼 하다보니 진짜 7키로가 왔고 그때 기대했던 젤을 팍 까서 먹었다.



        아 이런거였구나. 사실 평소에도 스포츠를 좋아하지만 전혀 하고 있는 운동은 없던 터라 에너지겔을 태어나서 나는 이때 처음 먹어봤다. 맛은 달큰하고 식감도 먹기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신기한건 먹고 조금 지나니 목도 하나도 안마르고 힘이 뿌앙 나는 것이었다. 어머 신기하다. 이래서 뭐든지 아이템발이 중요하구나. 되도 않는 근자감으로 나는! 아무 운동화 신고! 아무 옷이나 입고! 핸드폰 들고! 에너지겔 뭐야! 그냥 달린다! 달리기가 달리기지! 이런 과거의 나를 반성했다. 힘이 나니 몸이 훨씬 가뿐해졌고 목마르고 지친 나를 위로해주니 계속 뛰어낼 힘이 생겼다.


        에너지겔 덕분인지 10K를 지날때에도 바닥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 종착지를 10K로 정했을 때는 10K를 달성했을때 죽을똥살똥 했지만 목표를 15K로 정하니 사람 마음이 참 신기한 것이 금새 10.5를 지나 11K까지는 가진다. 그렇지만 젤빨도 잠시, 머리속이 공허해진다. 다시 11에서 15는 어떻게 가지, 막막해진다. 밑을 내려다보니 열심히 생각없이 뛰고 있는 내 두 발이 보인다. 발은 누가 뭐라든 하나둘 하나둘 걷고 있다. 기특한 내 발걸음을 생각없이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오 이거다 싶었다. 하염없이 달리려면 막막한데, 내 발걸음이 대략 (그럴리 없지만) 한 보폭에 100cm = 1m라고 하면 한걸음에 0.01km 씩 올라간다고 본다고 순간적으로 가정했다. 그러나 당연히 열걸음을 간다고 0.01km가 올라가진 않을테니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하고 한 걸음 마다 숫자를 센 뒤에, 숫자를 세지 않고 하나, 둘, 셋, 넷 걸음을 여유있게 텀을 둔 뒤 다시 한걸음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을 세는 식으로 뛰기 시작해봤다. 그럼 열 걸음을 열번쯤 세면 0.1km을 훨씬 넘는 거리가 지나있는 것이다!


        어머! 내가 0.1km가 올라가있으려나 하고 백걸음쯤 뛰고 시계를 들어다보면 영락없이 0.13km정도가 지나있는 숫자를 볼 수 있었고 너무 이득인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착각하고 기대없이 거리를 보고는 어머 기대보다 더 가있네? 이렇게 자가당착 적으로 뛸 뿐인데 그게 또 엄청 위안이 되었다. 물건도 세일할때 더 사고싶듯이 실제 뛴거보다 더 뛴거처럼 기록되는거 같으니까 계속 뛰고 싶었다. 숫자가 힘차게 오라가고 내 다리도 알통을 뿅 자랑하며 힘차게 뛰어주니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늙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젊은 것도 아닌 30대의 끝자락이건만 쌩쌩한 20대 젊은이가 된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3K쯤 지나고 있는데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애플워치로 처음 받아보는 전화였다. '어 여보 안경 어떤게 나은것 같아 카톡좀 확인해봐' 라고 한다. 아니 나는 지금 내인생 최고 장거리 뛰고 있는데 그거 말할 기회는 없네? 근데 수영하는 줄 알았더니 안경도 하러 간건가? 그거보다 손목의 아주 작은 스크린으로 남편이 보내온 사진들을 보려하니 사진들이 너무 작아서  안경이 잘 어울리는지 잘 볼 수 없는 것이 더 신경쓰인다. 아니 이건 안경 알이 너무 큰것 같은데? 그리고 유광을 산다고? 무광을 사야되는데? 하고 마음이 바빠진다. 다리는 혼자 뛰고 있고 나는 처음으로 애플워치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앱 이것 저것을 뒤져본다. 아니 또 전화앱은 왜이렇게 안보이는지? 그 사이에 안경알 갈아달라고 맡겨버리면 안되는데? 조급해진 마음으로 워치를 이것 저것 누르다보니 정말 희한하게 또 1Km가량이 나도 모르게 뛰어졌다...




        결국 14Km가 지나가고 거의 우리집으로 다 와가니 자연스레 15Km까지 완주가 가능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풀코스를 뛰었던 친구가 다정하게 하프 나가기 전에 15Km를 뛰어보면 될꺼라고 기운을 북돋아주고, 다들 좋다고 하는 이런 저런 장비들의 구색을 맞추고, 무엇보다 뛸라고 애플워치를 사겠다고 남편에게 큰소리를 치고 사버려서 사놓고 안뛰면 눈치가 엄청 보이는 그런 상황과 우연히 고맙게도 생리로 확보된 시간 덕에 하프 전에 15K를 뛰고 싶었던 나의 소망을 달성 했다. 진짜 뛰어냈다는 기쁨과, 천칼로리를 넘게 태웠다는 사실도 함께 기뻤다.


         엄마가 15K를 뛰었다!! 신나서 애들한테 말해봤는데 그래? 그렇구나! 하고 만다. 남편도 혼자 애들 보고  돌아와서 그런지 그냥 퉁퉁거린다. 되게들 안 알아주네... 그래 뭐 내가 누가 알아주라고 뛴건 아니니까! 그래도 Strava 기록을 보고 러너 친구들은 Kudos를 날려준다. 오 배지! 소감이 어때! 혹은 오 이게 누구야 15K 뛰신분 아니야! 장난스레 축하해준다.


        나는 이제 다음달 10월 3일에 하프마라톤에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내 생애 첫 하프마라톤에 도전해보련다. 그리고 나는 이제 제법 내가 '러너'라고 쑥쓰럽지만 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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