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 세상에 맥주가 없다면

by 배지

맥주는 그냥 다 너무 좋다.


어떤 순간이든 냉장고에서 막 꺼낸 얼린 잔과 시원한 맥주가 있다면 일단 기분이가 좋다.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는 그 맥주잔에 담긴 황금색 맥주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이 그냥 사라진다.

목구멍이 터져라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내 앞에 놓여있는 상황이라면 아들내미들이 숙제를 좀 안 했어도? 그럴 수도 있지. 남편이 일주일 내내 늦게 들어와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나는 한없이 너그럽다.

물론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맥주도 냉장고에 없는데 초등학생 아들은 눈높이를 안 하고 미루고 있다면? 바로 호통이 나간다. 아니면 시원하게 딱 한 입 꿀꺽 먹으려고 했는데 애들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결국 따라 놓은 맥주를 한 모금도 못 먹고 미적지근하게 탄산이 증발해버렸다? 그날따라 남편이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아주 그냥 눈이 세모로 변신한 마누라에게 있는 거 없는 거 탈탈 털릴 각오 단단히 해야 한다.


나는 맥주라면...

생맥주 병맥주 캔맥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


그런데 사실 지금보다 내가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생(生)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생생함 때문에, 느낌상 늘 선택의 순간이 있다면 병맥보다는 생맥을 고르곤 했다. 그러나 내 취향은 사실상 거품을 싫어하는 쪽이었고 생맥주는 늘 따르다 보면 원수에게 맥주 한잔을 대접하는 것 마냥 거품이 반 이상이라... 30대 후반쯤 되니 사실상 병맥이나 캔맥 쪽이 더 입에 맞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에 맥주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많은 음식들이 그 풍미를 제대로 못 살릴 것 같다.

아니 그냥 단언하겠다, 못 살린다. 맥주가 없는 세상에서는 ‘치맥 피맥 라맥’이라는 행위들을 하나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치킨 피자 라면을 먹는 효용이 엄청 떨어질 것이다. 치킨은 맛있지만 치맥은 더 맛있고, 피자도 맛있지만 사실상 맥주 먹으려고 피자를 먹는 사람도 있다. (물론 나다) 어떤 음식들은 그 음식 곁에 반드시 맥주를 곁들여야만 느끼함이나 심심함 등 음식의 아쉬운 부분을 순식간에 날아가면서, 그 맥주 한방이 음식 맛 전체를 완성시켜준다. 맥주가 없다면 그 음식들은 평생 그냥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음식 맛을 살려주는 고맙고도 고마운 맥주 되시겠다.


또 맥주가 없다면 육아 퇴근, 소위 말하는 육퇴를 할 수가 없다.

회사에서 집으로 한번 퇴근을 한 다음에 워킹맘이라면 애들을 숙제 봐주고 씻기고 재우고 밤 12시쯤 하는 두 번째 퇴근, 육아 퇴근이 있다. 이 육퇴는 짧은 시간! 농축해서! 최대한 신나게! 시간을 보내고 30분에서 한 시간 후에는 나도 취침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 되었든 길게 할 수가 없고 제일 좋은 것이 ‘편의점 캔맥에 꽃게랑’ 즐기기다. 애들 다 재워놓고 (하필이면 또) 금쪽같은 내 새끼 넷플릭스 두둥 틀어 두고 4개 만천 원 칭다오맥주를 하나 치직! 까서 꽃게랑을 와사삭! 씹어 먹으면 그날은 성공한 워킹맘이다. 세상에 별로 부러울 게 없다. 애들은 자고 맥주는 시원하고 꽃게랑은 너무 맛있거든...


한편 맥주가 이 세상에 없다면 소주를 먹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맥주가 없다면 다른 주류인 소주나 와인 막걸리를 먹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각각의 주류들은 각자만의 매력들이 있다. 잠들기 전 분위기 잡고 와인 한잔을 곁들이고 싶은 날도 있고, 좀 세게 속상한 날이면 변변치 않은 안주에 눈물처럼 맑은 소주를 기울이고 싶은 날도 있다. 그렇지만 맥주는 이런 특별한 친구들이 아니라 마치 할 말이 있어도 서로 이야기 나눌 필요도 없이 서로 통하는 오랜 친구 같은 존재다. 무슨 특별한 감정의 변화나 이벤트가 없어도 그냥 만날 수 있고 가볍게 기분 좋은 사이 랄까. 그래서 만약 이 세상에 맥주가 없다면 그 맥주를 대체할만한 다른 주종은 없을 것 같다. 비 알코올 분야로 가도 마찬가지다. 콜라는 달고, 탄산수는 싱겁다.


또 맥주가 없다면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기쁨이 좀 반감될 수 있다.

내가 익숙한 환경을 떠나서 새로움을 맛볼 수 있는 여행을 떠나면 일차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는 것에서 새로움을 느낀다. 낯설기도 하고 때로는 웅장한 자연을 처음 만나며 혹은 역사의 자취가 남겨진 옛 건물들의 고풍스러움을 바라보며 같은 나지만 다른 나를 생각한다. 여행을 갔을 때의 시각 다음으로 풍부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미각인데 나는 새로운 음식과 새로운 맥주를 맛보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여행지에서는 주로 그곳에서 많이 나는 식재료로 음식들을 만드는데 지금도 영국에서 가서 처음 맛보았던 기네스 생흑맥주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보통 흑맥주는 내 기준에서 필요 이상으로 마치 한약처럼 쌉싸름하면서도 바디감은 쑥 빠진 맹숭맹숭한 맛 같아서 편의점에서 절대 흑맥주를 집는 적은 없었다. 그러나 fish and chips를 먹으면서 기네스의 본고장 가까이 와서 기네스 생맥주를 안 먹어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켜 먹었었는데 와 그건 내가 알던 흑맥주와 완전 다른 맛이었다. 미식가가 아니니 몇 년 전 그 절묘했던 맛은 지금 글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눈이 번쩍 뜨이는 맛있었다. 내가 제대로 잉글랜드에 왔구나 생각이 들었었다. (더블린에는 가보지 못했던 것이 아직도 아쉽다…)

또 네덜란드에 갔을 때는 하이네켄 공장을 방문했던 시간이 아직도 내게는 아드레날린이 샘솟았던 기억이 난다. 공장 투어를 하면서 입장할 때 받았던 색색들의 코인 서너 개를 투어를 다니며 내면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하이네켄을 따라주는데 이거 뭐 그 공장을 나올 때쯤이면 별로 제정신인 사람들이 없었다. 다들 행복하고 다들 얼굴들이 무르익었다. 인생 참 재미있는구먼! 하고 느낌표 열개를 일기장에 끄적였었다. 맥주가 없었더라면 이런 여행들을 하면서 그 나라만의 문화를 즐겨보기에 한참 부족한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갑자기 맥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너무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다시 생각이 든다.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꽤나 시원스러운 위로가 되는 존재.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아직 4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기원전 3400년경부터 발견된 맥주의 지위를 넘보기에는 한참 애송이다. 손쉽게 맥주를 접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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