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아주 어리던 시절 동네에서 짧게 쓰는 육아용품을 사고 파는데서 시작해서 아이들이 커갈수록 연령대에 맞는 책 전집과 영어 교재들을 끊임없이 사고팔았었다.
대학생 때 샀다가 한 번도 끼지 못하고 서랍 속에 묵혀둔 구찌 선글라스, 여행 갈 때 면세점에서 충동적으로 샀던 핫핑크 가방 이런 아이템들을 누가 살까 싶었지만 당근 마켓에서는 모두 오케이였다. 쓰지 않는 물건은 볼 때마다 골칫덩어리였는데 그 묵은 답답함도 해소하면서 짭짤한 현금이 주어지니 일석이조였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고 아이들은 크고 내 노력과 시간이 아까운 나이대로 접어들자 당근은 관심에서 멀어졌다. 당근은 대부분 직거래인데 두 사람이 시간약속을 정해서 만난다는 게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었다. 또 품목이 주로 소소한 것들이다 보니 그냥 누구를 주거나 버리는 편이 해결이 빨랐다. 그렇게 나에게서 당근은 멀어져 갔는데.
복병이 나타났다.
우리 집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당근에 빠진 것이다.
한 달 용돈 4만 원 내에서 군것질도 하고 남는 용돈으로 소소한 걸 사고 싶을 때 당근마켓 가격의 물건들이 그에게 제격인 것이다.
아빠 핸드폰 속 당근 앱을 끊임없이 보다가 아들이 외친다.
'엄마! 나 이 키보드 6천 원인데 너무 사고 싶어!'
'그런 전자제품 소모품은 그냥 새 걸로 사는 게 낫지 않니?'
'이런 거 못해도 다 만오천 원 넘는단 말이야~'
아들이 합리적인 예산범위 내 소비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요청에 이거 정말 귀찮지만 교육적인 목적이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래 그럼 택비로 되냐 물어봐 택배비도 다 니 용돈으로 해야 되는 거 알지~'
'응 알어! ... 근데 엄마 택배는 이 사람이 안된대'
휴.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왜 이리 힘든 일인 것인가.
'알았어. 그럼 엄마 회사 안 가는 토요일 11시 되냐고 물어봐봐'
'어 고마워 엄마! 된대! 사자! 압구정 로데오역 7번 출구로 오래!'
내가 정말 금융회사 변호사인데.. 시간당 못해도 6천 원보다는 훨씬 많이 벌텐데.. 황금 같은 주말에 압구정까지 지하철 타고 6천 원짜리 키보드 사러 가야 하는 걸까.. 고민할 새도 없이 주말은 후딱 왔고 나는 약속 장소에 7살인 둘째 아들 손을 잡고 도착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6천 원 계좌이체 할게요'
키보드를 건넨 사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7살 데리고 지하철 갈아타고 오느라 기진맥진해진 나는 갤러리아 앞에서 무심코 키보드를 꺼내봤다.
때가 꼬작꼬작 묻은 낡고 낡은 키보드.
사진과는 달리 유선에다가 버튼도 하나 빠져있다.
정말 허망했다. 이런 게 우리 집에 있었다면 1초 고민할 새도 없이 바로 돈 주고 버렸을 텐데.
아들을 사랑하니 아들이 원하면 쓰레기도 돈 주고 사게되는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에 가서 거래를 주문한 아들에게 물건을 건넸다.
너무나 기쁜 그는 키보드가 좀 더럽지만 마음에 든다며 버튼을 하나하나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분리를 하더니
(아래 사진 더러움 주의.......)
나로서는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은 키보드 사이사이를 소독 스프레이를 뿌려가며 면봉 한통을 다 써가며 아주 깨끗하게 닦아냈다.
으악.
고양이를 키웠던 사람인지 짧은 흰색 털이 사이사이 무수히 껴있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초딩이는 기쁘게 닦아냈다.
문제는 그 사이를 모두 닦아냈는데,저 사진상 파란색 플라스틱 커버와 키보드 사이에 까만 먼지들이 들어가 있어서 닦아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귀찮은 것은 포기가 빠른 나는 '아이고 그건 어쩔 수 없겠네' 입으로 추임새만 넣고 있는데
청소를 좋아하는 남편은 말없이 드라이버를 들고 오더니 일일이 나사를 분해하고는 저 파란색 커버도 드러내고 미세 청소기를 가져와서 먼지 한 톨 없이 모든 더러움을 빨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