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재우려고 누운 뒤 잠시 핸드폰을 들었는데 핸드폰 불빛이 아들의 잠을 방해했나 보다.
"아 미안해 끌게 얼른 자~"
황급히 습관처럼 키던 핸드폰을 끄고 변명하는데
"아니야 엄마~ 글 계속 써."
하고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해 준다.
다정다감한 녀석.
나는 요즘 브런치에 미쳤다.
브런치라는 앱이 있어서 글쓰기를 위한 공간임은 알았지만 처음에는 작가 신청도 떨어졌었다. 두 번째 도전에서야 브런치에서 작가님! 하고 불러주었는데 그때도 열성을 가지고 글을 쓰진 못했다.
글 쓰는 건 어렸을 때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해서 수필로 학교에서 가끔 상도 타곤 했다. 어떤 수필의 내용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교지에 실린 그 글을 보고 감명받았다며 팬레터를 보내주었던 한 소녀의 편지는 남아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면서 참을 수 없이 글을 쓰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보통 공통적으로 삶이 힘들 때였다.
긴 시간 야근을 하고 집에 달을 보고 들어가는 길이면 버스에 앉아서 인스타그램에라도 그 푹 절여진 내 마음을 끄적거려줘야 했다. 로스쿨 때는 워낙 힘든 3학년 때 출산을 겸하며 변호사시험 준비도 하느라 삶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라서 글조차 쓸 수 없었던 것 같다. (애초에 시험 자체들이 답안지에 팔 빠지게 휘갈기고 나와야 했어서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이미 채워졌던 것 일지도)
고등학교 3학년때가 정말 가관이었다. 예민한 감수성의 소녀 마음에 수능이라는 역경, 오롯이 독서실과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주어진 나만의 시간과 완벽한 필기구. 그때 정말 별의별 시를 다 썼었다.
예를 들면,
방구. 이것은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을 공기의 울림소리. 그렇지만 여럿이 있을 때는 사회적 인격을 나락에도 빠뜨릴 수 있는 무서운 공기의 울림.
뭐 이런 식이 었다. 그때는 교실 천장 무늬만 봐도 바다에서 춤추는 갈매기들 같다고 느끼곤 했다.
지금 다시 나의 글쓰기 성수기가 도래한 것 같다. 아이들도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작지만 씩씩한 인간들이 되었고 회사도 한 회사를 14년이나 다녀버린 고인 물이라 크게 고민거리도 없다. 남편은 가끔 이해는 안 되지만 늘 성실하고 착한 마음으로 내 곁을 지켜준다.
사간과 자원이 되는데도 꾸준한 글쓰기의 마지막 장애물로 '나 자신'이 남아있었다. 글쓰기의 길을 잃은 나를, 오랜 친구가 글쓰기 모임에 초대해 주었다. 라라크루? 솔직히 처음에는 큰 기대는 없었다. 어차피 글은 혼자 쓰는 거고 내 글이 사람들 마음에 와닿으면 여러 명이 읽어주겠지. 이런 마음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서, 벌칙은 없지만 글쓰기를 강제해 주고, 글쓰기를 기다려주며, 내가 유치한 글을 써도 동료집단이 달려와서 하트를 눌러주고 따스한 댓글을 달아준다는 것이 엄청난 힘이 되어 주었다.
누군가 따스한 마음으로 읽어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나를 고취시켜 준다.
더불어서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몇백 단위의 조회수! 매일 그 조회수를 이어가고 싶어서 브런치에 미쳐버린 나는 어제 새벽도, 오늘 점심시간에도,
끊임없이 글을 토해내게 된다.
오랜만에 매일이 설렌다.
글쓰기 모임에 소개시켜준 친구에게, 그리고 새로 만나게 된 글쓰기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