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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 살기로 결심하다

The greatest suppotors 1_Two Mommys1

필자에게는 육친의 엄마.


또 육친의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


이렇게 엄마가 둘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육친의 엄마인 외할머니도 2020년 12월 30일 하늘나라로 소천하셨다.




신자유주의 시대 맞벌이 열풍 속에서 일찍이 기술을 배웠던 우리 엄마.


작년에 번아웃 혹은 우울증 초기 증상으로 드러눕고 말았을 때,

유튜브에서 '기우쌤'이라는 구독자 80-100만 가까이 되는 미용 기술을 가진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정말 부러웠다.


그 사람 외에도 미용 기술을 가지고 유튜브하는 헤어 스타일리스트 혹은 사장님들이 부러웠다.

그외에도 일식 오마카세 기술 등 요리 기술을 가지고 있는 요리사들도 대략 부럽다.


그리하여 필자는 왜 백면서생이 되었는지,

왜 국어와 심리학을 공부해서 이토록 늘 공부하고 준비하고 생각을 일삼아야 하는지 참으로 후회가 될 때가 최근 3-4년 동안은 정말 컸다.


화병[화병도 어차피 급성우울증이라고 해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서 우울증 증상이 갑자기 급작스럽게 오는 것]이거나 우울증이 오거나 공황장애 초기 증상이 시작될 때면 기술을 가지고 몸을 움직여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다.


그런데 그 기술을 가진 엄마는 기술을 배우는 동안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엄마가 엄마가 되기 전, 그리고 엄마가 된 후에도 기술로 산다는 것, 우리 나라에서 블루 칼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버겁고 힘든지 알고 그런 삶을 감내하고 살아 내셨기 때문에 엄마는 반대급부로 딸에게는 절대 기술을 배우게 하거나 상업 학교에 가게 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어느 순간 기울어져버린 우리 집안 형편을 고려하여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아예 일찌감치 중학교 3학년 때 엄마가 학교에 진로 상담을 받으러 가기 전에 대학교를 안 가겠다고 그러니 상고에 가겠다고 하였을 때

엄마는 말도 안 되고 너는 인문계를 가야 한다고

나중에 인문계 안가고 대학 못 나온 후에 누구를 원망하려고 그러는 거냐고 

엄마랑 아빠는 그런 원망 받기 싫다고 한사코 인문계를 가도록 종용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대학교를 못나오고 그래서 고생을 직빵으로 하고 은근히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와 무시도 받은 적이 있는 엄마 아빠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이었던 것이다.


엄마, 아빠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공부를 하니까 더 못 배운 설움에 꼭 대학교를 보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셨고 특히 딸 하나는 교사가 되면 좋겠다고 바라고 바라셨다.


사실 필자는 교수도 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에 문제집 살 돈도 없는데 그냥 교수와 학자는 내 편에서의 꿈으로만 가지기로 하고 학생부에 교수와 교사, 작가 등을 적절하게 섞어서 쓰곤 하였다.


엄마와 아빠는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어느 정도 곧잘 하고 학교에서 교우관계도 문제 없고 다방면에 끼도 ㅁ많아 합창단도 하고 활동적인 딸을 은근히 꽤 내심은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셨다.


물론 나 스스로는 우리 때 수능이 좀 쉽게 나와서 점수 인플레가 너무 심했는데 그때 좀 수능에서 미끄러진 감이 있어서 대학교 들어갈 때남 몰래 만족하지 못해서 눈물을 혼자 많이 흘리고 사실상 대학교 1학년 때는 아르바이트하면서 방황도 나름대로 하여 엄마 아빠의 속을 좀 많이 썩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공부는 항상 손을 놓지 않아서 자그맣지만 성적 장학금도 타서 엄마, 아빠 허리띠를 아주 조금은 늦추어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공부를 어느 정도 봐줄 만큼은 한 필자는 그래서 공부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사실상 세상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는 지혜도 모자라고 그냥 순수하기만 한 아이에 불과하였다.


엄마는 항상 그런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노심초사하고 저렇게 물러터지고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강단이 없어서 어떡하냐고 걱정도 많이 하셨더랬다.


더군다나 계속 임용고시에 낙방하고 자존감도 많이 떨어지고 그때는 우리집 형편도 지금같지도 못해서 스스로에 대해서 또 집안 형편을 둘러 보면 자존감이 없는 찰나.

엄마는 좀 풀이 죽어 있는 나에게 늘 


"내가 너처럼 4대문 안에 있는 대학을 나왔으면 나는 네 활개를 치고 다닐 거다."

라는 말을 입방아처럼 달고 사셨다.

그러면 늘 그랬다. 나는, 


"그래도 얼굴은 아주 예쁜 편은 아니잖아."


그러면 엄마는 또 그런다.


"네 얼굴이 뭐 어때서. 네 얼굴에 자신감을 갖고 살아."


그래. 엄마 뱃속에서 나왔다는 특권, 엄마의 딸이어서 얻는 특권은 이런 것이리라.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엄마는 나에게 절대로 못난이나 메주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늘 "꽃네"라고 불러 주었다.


특히 중학교 때 교련 시간 관련하여 겨울 방학 때인가 예절학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 '잎네반', '꽃네반'으로 나누어서 우리를 가르쳐 주셨다고 하니 그때 꽃네반이었다고 엄마가 맨날 "김 꽃네"라고 불러 주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애칭을 참 많이 쓰곤 하셨다.


'고니, 꼬니, 꽃네' 등 나를 애칭으로 불러 주는, 단 하나의 사람, 우리 엄마.


또 우리 엄마는 늘 깨끗한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늘 애쓰셨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 집안을 쓸고 닦으셨다.

그때 당시도 우리집이 역세권이기 때문에 먼지들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는 매일 필수였고,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딸까지 청소에 동원하며 청소에 늘 진심이셨다.


그러나 그 덕분에 깨끗하고 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늘 공부에만 매진하고 시간이 나면 책 읽고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글이 잘 쓰일 때는 집안이 싹 다 잘 정돈되고 청소기를 싹 돌린 후 가지런해질 때이다.

물론 아주 아주 아주 바쁠 때는 예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엄마는 나를 낳았다는 특권으로 아주 어마어마한 나의 써포터이기도 한 것이다.


미용업을 몇 십 년간 한 CEO인 만큼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 머리를 맡은 전용 미용사는 엄마 뿐이었다.


엄마는 끝에 기술을 많이 연구하지 못하셔서 기존에 늘 하던 방식, 스타일만 하는 그런 난조를 겪기도 하셨지만 그래도 집에서 야매 미용실을 하면서 늘 사람들 머리를 요리조리 연구하여서 스타일을 멋지게 변신시켜 주시곤 하였다. 특히나 아줌마 파마도 엄마는 드라이를 한 것처럼 펌을 나오게 하는 스타일을 잘 구현하였다. 그래서 아주 촌스럽지 않은 드라이를 한듯한 펌으로 엄마의 야매 미용실은 동네와 엄마의 기존 단골 손님들, 그리고 엄마의 지인들 사이에서 솜씨 좋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리하여 엄마 딸이라는 특권으로 그렇게 이름난 전용 미용사를 두고 다른 미용실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은 우리 가족이라면 누구나 예외는 없었다.


엄마가 아빠, 오빠, 남동생, 나 그리고 엄마의 머리값만 해도 집에 keep해 준 돈은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이리라고 본다. 엄마가 하늘 나라로 돌아가고 보니 이제 그런 것도 어마어마한 값어치로 다가온다.


예전에는 빨리 나도 이름난 헤어숍에 가서 제발 좀 트렌디하게 아나운서 단발머리를 해 보는 게 소원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정도는 철이 덜 들기도 한 생각의 처사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당연한 심리인 것이 어리고 젊은 마음에 유행이 또래와 타인 앞에서 얼마나 민감하게 충족되어야 하는 건지는 모두가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는 물론 교회 등 외부에서 각종 행사가 있을 때, 결혼식, 고등학교 합창단 정기 연주회, 입학식, 졸업식 등 이런 모든 것에서 엄마의 솜씨는 빛이 났다.

불에 달군 고데기로도 머리를 하여 보고 엄마 덕에 조금 촌스러운 기품이 묻어나기도 하지만 끝발 날리는 스타일링을 하고 각종 집안 대소사와 학교 행사에 잘만 다여온 기억이 있다.


그럴 때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엄마랑 앉아서 엄마의 머리 손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정말 진심으로 유쾌하고 즐거우신 것이다.


엄마는 내 평생에 그 누구보다도 내 머리 두상과 머리결에 진심으로 가장 잘 아는 김꽃네 전문 미용 스타일리스트이셨던 것이다.


이런 엄마였으니 중학교 이전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머리를 묶거나 땋아서 가는 데에 엄마의 손길이 때로 멋진 스타일링을 연출해 주었다.


단 한 번도 더러운 옷을 입혀서 학교나 어디 바깥에 내보내신 적이 없고, 그건 머리 손질도 마찬가지이셨다.


아무리 바빠도 딸래미 머리 하나는 또 끝발 날리게 연출하여 학교에 보내 주셨다.

지금도 내 5-7살의 사진과 초등학교 사진 등을 보면 엄마가 묶어준 소공녀 머리, 롤 모양 머리 등 예쁜 머리 모양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괜시리 나는 가끔 머리를 빡빡 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였다.

오빠랑 동생처럼 강한 남자처럼 보이고 싶고 되고 싶은 동경이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남자들 틈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이쉬한 옷과 스타일이 자연스럽고 편하고 좋아 보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실 지금도 여성스러운 레이스나, 프릴, 시스루, 몸매가 드러나는 니트류 등은 질색 팔색이다.

엄마가 엄마 취향대로 그런 쪽으로 많은 개발을 시도하고 사오기도 하셨지만 나는 늘 한결같이 

"NO."

질색 팔색이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나의 동경을 시도하여 오빠랑 동생처럼 선머슴같은 숏커트를 시전하여 보고 싶어서 거의 한 달인가 몇 달을 졸라서 엄마에게 머리카락을 잘라 달라고 주문을 넣었다.

나도 오빠랑 동생처럼 머리를 해 달라고 한 것이다.

엄마는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거듭 거듭 받고 정말 선머슴같은 커트를 해 주었다.

그걸 하고도 나는 사람들에게 Weird한 느낌을 주고 싶어서 그 머리에 치마를 입고 다녔다.

그때 집에는 한 두개의 치마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뭔가 그때부터 나만의 개성을 원했고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기어코 해보고 사람들을 조금은 서프라이즈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어리둥절한 시선, 이 아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지금까지 이런 초등학교 여학생은 없었다, 이 학생은 여학생인가 남학생인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하고 싶어서, 영화 <극한직업>의 대사를 패러디하기에 충분한 그런 시선을 받으며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나에 대한 의아함과 뜨아함의 생각 풍선을 달아 놓는 것을 즐기는 것이 바로 김꽃네의 의외의 머리 스타일링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여 나는 짧은 숏커트 머리 스타일을 즐기고 핏한 몸매를 가꾸고자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하고 식이 조절을 한다.


그리고 정말 고마운 것이 초등학교 때의 요구도 2학년 때랑, 5,6학년 때랑 또 중학교 때도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나의 스타일링 요구에 있어서는 수용을 잘 해 주고 나를 지지해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실생활에서 엄마 말을 잘 안 듣고 잘못하는 것은 한두어 번, 몇 번 벼르다가 혼쭐을 내시곤 하였다. 우리 엄마는 자식들 모두에게 늘 2-3번은 봐 주고 3-4번째에는 매를 드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래서 참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참 잘 혼나고 맞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엄마를, 아빠를 무서워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그 덕분에 바깥에 나가면 아예 버릇 없는 아이로는 나도 오빠도 남동생도 그렇게는 자라지 않았고 어디 가서나 예의 바르고 아이들이 참 바르고 올곧고 덕스럽다는 칭찬을 꼭꼭 들었다. 그것이 다 집에서 아빠와 엄마의 철저한 훈육과 밥상머리 가르침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물론 때로는 좀 개처럼 맞아서 좀 마음이 무겁고 힘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머리채를 잡히고 헤드뱅잉을 해야만 하는 일이 그렇게 우리집에는 종종 있었다. 그래서 증오도 있고 애정도 있다. 아마도 거짓말을 했거나 정말 무진장 잘못을 한 사안일 때는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도 아빠도 두 분 모두 엄마, 아빠의 기술로 항상 나를, 그리고 오빠와 남동생을최대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지지하여 주셨다.


엄마가 계시는 동안 그렇지만 어느 순간 엄마가 트렌디한 헤어 스타일은 못하다는 걸 알고 좀 많이 답답해 했던 것도 있다.


유행은 아나운서 단발 스타일인데 엄마가 해 주는 단발머리는 항상 그냥 옛날식의 여중생 단발 머리만 할 줄 아셨던 거다.


그래서 나는 언제쯤 내 전용미용사여서 좋기도 하지만 그 식상한 전용 미용사인 엄마 말고 유행하는 머리를 해 줄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언젠가 만날 수는 있기나 한가 하고 한동안 많이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 머리를 하는 데에 새롭게 많은 돈이 든다는 걸, 그리고 내 마음에 꼭 맞는 헤어 스타일리스트 선생님을 만나기까지 지난하고 험난한 길이 펼쳐져 있다는 것도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야 다 겪으면서 알게 된 일이다.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 마음에 드는 미용실을 고르는데도 몇 달, 몇 년은 걸린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뜻 내 머리를 맡긴다는 것은 엄마 살아 생전에 미용실을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도 당연히 구관이 명관이라고 엄마의 손길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생각이 들자 울컥 울컥 머리를 하면서도 그분이 종종 오시곤 하였다. 


아무튼 엄마 딸래미 찬스로 내 얼굴이 예쁘다고 항상 네 얼굴에 자신감을 가지고 살라고 강력하게 말해 주던, 단 하나 뿐인, 나의 엄마.


엄마가 돌아가고 나시고 십 년이 넘어가는 지금.

엄마를 조금씩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는 요즘에서야 나는 엄마가 나에게 강력하게 해 주 그 모든 말을을 이제서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래, 이 얼굴이 또 엄마와 아빠에게서 오기도 한 것이니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잘 섞어서 담아 놓은 나의 얼굴을 나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야지.


이렇게 항상 나를 그냥 무작정 지지해 주던 엄마. 그 진짜 엄마가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두 눈 부릅뜨고 나를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면서 두 눈 시퍼렇게 영혼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


그래서일까. 좀 잘못을 저지를 때면 좀 그렇다.

엄마가 옆에 곁에 있는 느낌이 종종 들기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하늘 나라에 있기에 그래서 몸은 떨어져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영우너히 이어져서 함께 있다고 여긴다.


엄마는 늘 그때 그 모습으로

"김꽃네! 네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

내가 너처럼 대학교 나왔으면 네 활개를 치고 다닌다.

내가 너 같으면 나 하고 싶은 거 다한다."

라고 한결같이 외치고 있다.


이제 그 말을 강력하게 믿고 스스로에게 외치는 나는 그 말을 나의 아이들에게 해 주고 있다.

정말 이제 엄마의 그 말처럼 나는 나의 얼굴과 모습에 당당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단 한 사람의 믿음과 그 고백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밑바탕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그 말은 진짜고 그 말대로 되었고 되어가고 있고 되어갈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나를 사랑하고 축복한다.

한없이.


엄마 딸이라는 찬스의 특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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