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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 살기로 결심하다.

20-30대 직장생활과 그 반대급부로 앓은 쇼핑중독자 (참고로 비정상인)

시스템을 벗어난 BAG. 소속도 있지만 딱히 매이지도 않은 독립노동자. 앞으로 기획출판을 꿈꾸며 동시에 플랜B로 독립 출판사를 차려 전자책 독립 출판을 꿈꾸는 예비 독립 출판가.


대학교에서 인문학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다가 결국

국어로 교직이수 신청을 못하였다. 

당시 지도교수님에게 외부 기업 장학금 신청에 추천서를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 꼭 국어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오라는 말씀도 계속 듣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인문학부 탑 4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4명 모두 교직 이수를 신청하였다. 한 전공당 4명씩밖에 선발되지 않는 교직 이수는 그래서 물 건너갔다. 역사로 했으면 가능성이 있었을 수도 있었는데 역사 전공은 생각도 안하고 있었기에 듣지도 않았다. 플랜 B나 C 그때는 그런 것도 생각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다간 정말  교직 이수 그리고 엄마가 그록 꿈에 그리는 교사의 길로는 못 가는가 싶어 발을 동동 구르던 차에 자초지종을 친한 과 선배 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지금 시점에 전과 신청을 받을 수도 있으니 알아보고 해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알아보니 정말 사범대 쪽 교육심리학과와 교육학부에 TO가 있었고 전과 신청을 받고 있었다.


국어 교직 이수에 목을 매던 4등 아래 많은 아이들 중 나를 포함한 인문학부 국어국문학 전공생 중 3-4명이 전부 교육심리학과로 그해에 전과를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외부 장학금 추천서를 써 주신 인문학부 국어국문학 전공 지도교수님에게 말도 없이 전과 신청하여 학부를 떠났다고 그 다음 봄학기에 국어국문학 조교의 전화를 통해 몰래 불려가 엄청 말로 뚜드려 맞고 혼이 쏙 났다.


그런데 그이후 졸업식날도 찾아 뵙고 그 이후 13년 정도 지나 선생님 은퇴를 한두 해 남겨 두신 시점에 결국 선생님을 찾아 갔을 때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그런데 이미 선생님은 그 모든 것을 잊고 괜찮다면서 호호 할머니가 되셔서 오히려 나를 퇴근길에 데리고 당신이 자주 가시는 체질별 진료를 하고 약을 지어주는 한의원에까지 데리고 가셔서 가볍게 침도 맞혀 쥣고 내 건강을 염려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대학 졸업 전 4학년부터 20대에 걸쳐 공립 중고등학교 임용후보자선정시험을 향하여 긴 터널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엄마의 마지막까지의 바람도 공립학교 국어 교사였기에 차마 그것을 끝까지 저버릴 수가 없어서 엄마가 돌아가던 해도 국어 임용후보자 선정 시험을 준비하였다.

엄마는 잠도 못자면서 신경증과 히스테리를 앓으면서도 밤마다 다시 딸이 국어 임용고시 공부 시작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감사 기도를 올리셨다.


결국 되지는 않았지만 그 감사의 기도가 쌓여서인가.


2010년 겨울 나를 마지막으로 찐하게 사랑해 주고 돌보아 준 후 엄마는 자기의 소임을 다한 사람마냥 원래 자기 본향인 하늘 나라로 돌아간 이후, 서른 살부터 나는 직업상으로 안정화되어가기 시작하였다.


큰 돈은 벌지 못하였지만 서른 살부터 작년까지도 그리고 2020년 10월 14일까지도 크게 쉬어 본 적 없이 바로 바로 수월하게 알음 알음 지인 찬스로 이직에 계속 성공하였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후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HR 교육 컨설팅 및 리더십 코칭, 워크숍 교육 회사에 다니면서 내면의 진정성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 메이킹도 중요한 것을 계속 보고 배우며 스타일링과 다이어트, 건강 관리에 큰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히 회사 사람들의 모습을 따라 외적인 것을 채우는 데에 상당히 혈안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래서 출혈도 많았지만 지금에 와서 감사한 것은 지금의 스타일인이나 간지(?)는 그때 많이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원 강사와 임용 고시 사이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백면선생이던 나를 일깨운 건 거의 8할이 그때의 체험이 크다.  


그러나 성인을 상대로 하는 교육 회사의 경험과 다양한 현장 체험의 기쁨도 잠시였다.

13년에 친구의 배신 아닌 배신, 거짓된 이미지 메이킹에 친구를 나 스스로 상실하였다.

그렇게 그 친구 걱정 반, 그 친구가 그 지경이 되기까지 나는 친구를 지켜주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으로 불면의 시간을 3-4개월 보낸 후 가슴이 답답하고 가끔 숨을 잘 못쉬고 머리 뒷골이 당기는 화병[급성 우울증]이 시작된 후 우울증, 화병에 한약과 침 요법 등으로 한 해에 50-100만원은 늘 고정으로 지출하였다. 또 그렇게 화병으로 몸져 누워 있다가 다시 봄이 오면 걷기 시작하여서 다시 몸과 마음의 상태를 끌어 올리고 여름 가을 몸 좋을 때는 돌아다니면서 그리고 인터넷상 장바구니에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가득 채워 놓고 그것들을 사는 것으로 낙을 삼고 스트레스를 풀어서 10년 가까이 매월 100만원씩만 모으기만 해도 일 억 가까이는 혹은 그 넘게 모았을텐데 실은 그러지 못하고 겉만 번지지르하고 시끄러운 깡통 인생에 불과하였다.


늘 베풀기만 좋아하고 내 돈은 관리하고 모으고 투자하지 못하는 모지리였던 것이다.


또 동생이 해군 장교로 일하다가 하늘 나라로 먼저 간 후 동생의 사망에 대한 인명 피해 보상금으로 받은 일억 일천이 넘는 돈을 가지고 아버지는 먼저 일천 만원 가까이 십일조를 내셨다. 


그후 아버지는 자꾸 2015년도 11월이면 하늘 나라에 간다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눈물을 보이며 서럽게 말씀하셨다. 그걸 반은 믿고 반은 안 믿었다.


결국 아버지는 앞으로 아버지가 죽고 나면 나의 주거 문제가 불안하다면서 그 보상금과 우리의 모든 돈을 합쳐서 집을 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사천만원과 나의 삼천만 원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호언장담하였지만 사실은 내 수중에는 없는 이천 만원 가까이를 직장인 신용대출로 빌렸다. 그걸 보태서 중국동 역세권에 15년 된 빌라를 아버지가 보고 오셔서 결국 아버지의 추진력으로 일억 팔천삼백 만원에 구매하였다. 실은 더 높게 부른 것을 아버지가 특유의 후려침으로 가격을 다운하고 거기에 이백만원까지도 깎아서 그 가격에 구매한 것이다. 


원래는 나보고 들어가서 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미 이천만 원의 대출이 걸려 있었기에 혼자 독립하면 생활비도 만만치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모든 것을 다시 정상화하려면 독립이 아니라 월세를 주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 아래 좀 기다려서 월세를 주어다. 


그리하여 집 산 지 약 8개월만에 아빠와 나는 월세를 받는 월세 수입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한다던 매일의 입에 걸린 말을 실행하지 않은, 나의 희생 때문인지, 그집에 살지 않는 내 희생(?)을 감안하여서인지 그 월세 통장을 나보고 관리하라고 주셨다.


누구는 당연히 받아야 할 화라며 그 정도 혼은 나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하였다. 맨 처음에는 언젠가 그 모든 것을 

 오빠에게 삼천만원 받아서 아빠에게서 독립하겠다는 말을 2016년 여름 끝과 가을 초에 한 번 꺼냈다가 완전히 새언니에게 박살이 나고 돈을 그냥 받을 생각 말고 빌리는 것으로 알라고 초전박살이 나고ㅓ 괜히 새언니 앞에서 우울해서 물건 사는 것으로 돈을 탕진했다고 우울해서 그랬다고 질질 짜면서 설설 오빠네 집에서 나오는 이상천외한 체험을 한 후 정말 이제는 이런 일을 다시는 일으키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다시 당하는 수치는 겪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약간을 결연해져 있었다.


그리고 또 연말 결산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과 화병, 공황장애 초기 그 어디쯤을 헤매면서 이제는 이 업무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그다음해 초반에 회사가 변화 컨설팅을 받을 때 내 잡 포지션도 HR 방향으로 변경을 원한다는 신청을 하면서 3년 가까이 일한 회사에서의 근무도 어느 정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을 맞았다. 


그리고 심지어 엄마, 아빠, 외할머니, 삼촌, 고모, 이모, 숙모, 숙부, 오빠, 동생이 바라고 원하고 소망한 대로 국제학교 국어 교사로도 일정 기간을 근무를 하여 아빠와 집안의 자랑거리도 되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문제였을까.


가장 잘 될 때, 스스로가 섰다고 생각하였을 때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때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자취의 경험이 없고 혼자의 시공간을 경영하고 관리하는 법도,

식자재와 생활 용품을 사고 자기 돈을 관리하는 습관을 한 번도 들인 적 없는 상태에서 독립한 것이 화근이다.


거기에 정말 모두가 그리고 나 자신이 원한 정규직 교사의 길을 간 것도 어쩌면 스스로 고삐를 당기지 못한 큰 화근 중의 화근이 되었다.


또 국제학교가 있는 일산으로 이동하여 45만원 월세를 내는 사택에 살면서 월세 20만원은 주거비 지원을 받고 나머니 25만원은 그동안 집에서 살면서는 없었던 지출을 하면서 날아가는 돈이 되었다. 당연히 1주택자면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서 더 저렴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당시 월세 내놓은 집의 보증금을 그냥 놔 두면 안 되겠다는 판단 아래 그 돈으로 또 상도동 쪽 비역세권에 신축 빌라에 갭 투자자를 하였다. 전세 보증금 2억에 실각격 이억 이천만원 하는 신축 빌라를 산 것이다. 2 주택자가 뭐가 좋은지도 모르면서 오히려 결혼 안한 나에게는 큰 메리트가 없는 투자일 수도 있는데 난 당장 눈 앞의 내 일신보다는 그저 몇 년 묵히면 오르리라는 생각에 그때 당시엔 부동산 투자에 좀 마음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 2017년 8월 14일에 국제학교로 이직함녀서 그 이전에 쌓아둔 카드빚 370여 만원을 기존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연말이 지나 다음해 초에 갚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일산으로 이동하면서 이제는 신용카드를 쓰지 않겠다고 신용카드를 다 자르고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체크카드만 쓰겠다고 체크 카드를 다양하게 급여 통장, 용돈 통장, 저축 통장 하여서 다양하게 준비하여 갔다.


그리하여 주민 등록상 생일이 올 때까지 소비와 낭비, 지름신과 완전히 Bye하였다.


그리고 정말 아끼고 아껴서 돈을 모았다.


그리하여 아껴 쓰고 줄여 써서 결국 이전의 카드빚을 다음 해 초 생일 즈음에 다 청산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생일이 돌아오고 현금으로 나에게 생일 선물로 안경을 맞춰 주었다. 그런데 한 개만 맞춰 주어야 하는데 색상이나 디자인을 참지 못하고 두 개를 맞춰 주어 오십만 원을 썼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다시 나의 쇼핑 중독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갑자기 2월엔가 3월엔가 학교 앞 슈퍼마켓에서 일십만원을 현금으로 주는 유혹에 L사 카드를 만든 것이 화근이었다.


갑자기 또 정규직 직장인이어서 그런가 한도를 1200만원이나 주었다.


그 한도를 낮추려 하였으나 그걸 낮추면 나중에 올리는 것은 어렵다는 말에 낮추지도 못하였다.

언젠가 결혼할 수도 있으니 만약에 돈을 못 모르면 카드 한도 내에서 혼수를 준비해 보겠다는 아주 깜찍한 사고 방식을 가진 거였다.


그렇게 조금씩 사부작 카드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고 나중에 학교를 그만 둘 무렵에는 1350만 원까지 한도를 높여 지금 아니면 또 살 수 없다면서 영원히 학교에서 일할 줄로만 알고 먹고 마시고 옷 사고 신발 등을 사는 데에 돈을 물쓰듯이 썼다. 모든 버는 돈을 썼고 그것도 모자라 월세 통장까지 손을 대었다. 그런데 어차피 매월 25만원의 월세가 들어갔고 아버지께 용돈을 고정적으로 매월 드렸다.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돈을 모으자면 정말 자린고비처럼 살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나를 한없이 집착하고 나의 소비 행각에 기함을 하며 다 큰 을 고무 바가지로 머리를 후려치기까지 하던 엄마가 돌아간 후 나를 잡아 줄 사람은 단단히 고삐를 매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국제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제는 이렇게 누려도 된다는 정말 많은 것을 희생한 나는 이제는 누려도 마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원래 사던 브랜드에서 상향하여 옷과 신발을 사고 거의 매일 사 먹는 식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카드값 1350만원을 돌려 막다가 학교를 나오면서 집을 구하기 위해 신용대출 받은 일천삼백만원 주에서 일천만원으로로 오피스텔 보증금을 냈다. 그런데 그 천만 원도 19년도 6월부터 꺼내 쓰기 위해 보증금 일백 만원에 월세 육십만원 짜리 오피스텔로 이사하였다. 왜냐하면 학교를 나오면서 직장인 신용으로 마이너스 통장 일천만원 연 것은 이미 2019년 5월 안에 카드 빚 갚으면서 매월 또 그만큼 원래 하던 대로 고정 지출을 150-160만 원 가까이 하고 살아서 이미 마이너스 통장도 돈이 다 없어지고 깡통 통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년도 11월 아침 청소 아르바이트 두 개가 날아가고 수요일 한의원 아르바이트도 날아가고 나서 더이상 학원 월급과 주말 편의점 아르바이트만으로는 매월 리볼빙해 놓은 카드빚을 포함한 모든 빚 150여 만원을 감당할 수 없었다. 카드빚이 점점 불어나 모든 신용대출과 마이너스 통장까지 다 끌어 쓰고 그것도 모자라 빚을 갚기 위한 빚인 카드론까지 두 개나 받아서 총 오천만원 빚의 실체와 월세 통장까지 다 써 버려서 약 2350만원까지 탕진한 사실을 결국 19년 12월에 20년 1월에 아버지에게 알렸다. 연말 연초에 좋은 새해 인사는 못 드릴망정, 오천만원의 카드빚이 불고 불어나 펼쳐진 빚 잔치와 거기에 10년 가까이 천만원 한 장도 모으지 않은 딸의 실체를 알고 나서 아빠는 경악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집 팔고 나서 빚 탕감하라고 삼천 만원을 주신 후 거의 4개월 가까이 분통을 터뜨리셨다.


결국 그리하여 이십 대 때 시스템으로 들어가 보려던 자의 결핍과 불안, 삼십 대 나름 정규직의 시스템 속에서의 좌충우돌 속에서 쇼핑 중독이라는 고질병과 화병, 우울증, 공황장애 초기 증세를 왔다리 갔다리 하는 탕녀의 삶은 아빠와 오빠, 새언니에게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젊은 날의 고군 분투 속에서 모지리로 산 나. 그리고 얻은 것은 화병, 빚을 갚으면서도 이게 언제 끝날지 터널이 안 보여서 노심초사하고 힘들어하면 온갖 불안 속에서 전전반측, 전전긍긍으로 업무 스트레스로 화병과 우울증은 계속 되었다.


그리하여 19년도 5월에 과민성대장증후군까지 몸에 달고 살고 장이 안 좋아지니 먹는 것도 제대로 못먹고 그러니 우울증, 화병이 계속 같이 가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결국 2020년 10월 14일부터 빚이 좀 남았고 빚을 갚아야 상황이지만 이러다가는 죽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시스템 속에서 일할 만큼 일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죽을 것 같아서 어차피 시스템 안에서 죽으나 밖으로 나와서 죽으나 탕녀에게는 매 한가지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벼랑을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학원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드디어 제 갈 길 찾아서 가야 할 때가 왔다고 느낀다.


주위에서 5-10년 연배가 높은 분들은 지금 독립 선언하길 잘 했다고 하신다.


나이 드신 분들은 더 나이가 들면 그때는 독립할 엄두도 못낼 거라고.

지금 하실 잘했다고 응원하여 주시고 칭찬하여 주신다.


이렇게 모든 것을 탕진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정상이 아닌 돌아온 탕녀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사부작 사부작 사부작 글을 쓰기 위해 이제는 진짜 내 일, 내 글을 쓰기 위해 과감히 시스템을 거부하고 독립 노동자로 살기로 올해 부로 선언하고 2021년 3월 7-10일을 기점으로 삼일절을 맞아 대한 독립 만세 선언과 함께 유튜버로, 블로거로 작가로서 독립 노동자, 예비 독립 출판가를 준비하면서 올해는 나 자신에게 모든 자본과 시공간과 모든 내가 끌어올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만날 수있고 접할 수 있는 모든 인프라를 동원하여 나에게 투자하기로 결심하고 실행하고 있다.


몇 십 년동안의 쇼핑 중독과 최종 그 결과물인 오천 만원의 빚을 갚고 나서 죽었다 살아난 탕녀가 스스로에게 다시 일어서라고 매일 칭찬하고 격려하고 스스로를 수용하고 인정해 가는 여정의 첫 걸음에 있는 것이다.


아주 잘한 결정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해온 결정 중에서도 아주 잘한 것 중에 하나라고 

아니 어쩌면 제일 잘한 결정이라고 칭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Hn6-MbfbX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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